우크라이나 전쟁: 어느 젊은 군인의 쓸쓸한 장례식

남부 헤르손 근처에서 전사한 드미트로 코텐코는 리비우에 묻혔다. 리비우는 현재까진 포격으로부터 안전한 곳이다
사진 설명, 남부 헤르손 근처에서 전사한 드미트로 코텐코는 리비우에 묻혔다. 리비우는 현재까진 포격으로부터 안전한 곳이다

드미트로 코텐코의 관이 땅에 묻힐 때 그의 가족은 곁에 없었다. 코텐코의 부모는 아들의 무덤 위로 울려 퍼지는 총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아들의 관 위 나무로 된 십자가에 묶인 리본이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 또한 듣지 못했다. 관을 묻기 위해 파낸 흙도 보지 못했고, 아들의 시신이 완전히 땅에 묻혔을 때도 꽃 한 송이 바치지 못했다.

코텐코의 부모는 아마도 아들이 그날 리비우의 리차키우 묘지에 묻힌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을 것이다. 코텐코의 부모는 다른 어린 두 자녀와 함께 리비우에서 약 960km 떨어진 동부 도시 수미 근처에 있다고 했다. 수미는 현재 러시아군의 집중 포격으로 외부와 연락이 단절된 상태다.

코텐코의 부모는 그러나 아들의 사망 소식은 알고 있다고 했다. 코텐코는 러시아 침공 사흘째인 지난 2월 26일 남부 도시 헤르손 근처에서 전사했다. 21살 청년의 첫 전투였다. 전사 이틀 후, 그의 어릴 적 친구이자 포병인 바딤 야로벤코는 친구의 부모님께 전화로 사망 소식을 전했다.

코텐코는 러시아 침공 3일째가 되던 날 전사했다. 그의 나이 21살이었다
사진 설명, 코텐코는 러시아 침공 3일째가 되던 날 전사했다. 그의 나이 21살이었다

야로벤코는 밤새도록 이 전화를 걸 용기가 선뜻 나지 않았었다고 했다. 이젠 친구 코텐코가 이 세상에 없다는 걸 느끼며 리비우의 군용 침대에서 혼자 길고 긴 밤을 지새웠다.

이 두 청년은 15살이 되던 해 처음 만났다. 갓 깎은 머리와 새로 산 제복 차림으로 사관학교 첫날 만났다고 했다. 서로 이웃 마을 출신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평생의 우정이 시작됐다고 회상했다.

코텐코의 아버지는 트럭 운전사였으며 어머니는 지역 농장의 노동자였다고 했다. 야로벤코는 "군 입대는 출세를 의미했다"라며 "코텐코가 입대한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코텐코의 집은 가난했다. 부모님과 아들 셋으로 이뤄진 이 가족은 우크라이나 동부의, 러시아 국경 근처 작은 마을에 살았다. 러시아어를 쓰는 지역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의 폭압으로부터 구해내겠다고 호언장담한 바로 그 지역 출신 사람들"이라고 덧붙였다.

야로벤코는 러시아의 지난 2014년 크림반도 합병과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쟁도 이들이 입대한 또 다른 이유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전쟁이 터지면 직접 나가 우리 땅을 지켜내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왜 전쟁통에 군대에 가고 싶냐고 물었을 때, 코텐코는 '제가 아니면 누가 가나요?'라고 말하던 친구였어요."

코텐코의 관이 리비우의 군사 교회로 운구되는 모습. 이날만 3명이 땅에 묻혔다
사진 설명, 코텐코의 관이 리비우의 군사 교회로 운구되는 모습. 이날만 3명이 땅에 묻혔다

야로벤코의 아버지도 트럭운전사였다. 이 뿐만이 아니라 수미의 사관학교에서 이 둘은 자동차에 관심이 많다는 공통점도 발견했다.

외동아들인 야로벤코는 코텐코에게서 형제애 같은 것을 느꼈다고 했다. 야로벤코는 "우리 둘 다 도시에서 즐기는 오락거리나 클럽을 즐기지 않았다. 대신 낚시, 사냥, 소풍 등 자연에 시간을 보내곤 했다. 친구들과 강에 놀러 가는 걸 참 좋아했다"라고 말했다.

야로벤코는 코텐코가 가족 소유의 조그마한 땅에서 고치던 낡은 빨간색 지굴리 자동차 수리를 도운 적도 있다고 했다. 이들은 오토바이를 수리해 집 근처 시골길에서 운전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서로의 가족과도 왕래했다고 한다.

야로벤코는 뺨에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코텐코의 부모님은 아들을 사랑했다. 코텐코도 부모님을 사랑했다"라고 말했다.

"코텐코는 항상 부모님을 도와 물건을 수리했고 코텐코는 수리를 잘했어요. 심지어 학교나 사관학교에서조차 그는 항상 나서서 도와주는 친구였습니다. 부모님께 잘하던 아들이었어요. 코텐코 가족이 싸우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야로벤코는 포병이 되고 싶었지만 코텐코는 공수병이 되고 싶어 했다. 2년간 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마친 뒤 이들은 헤어졌다. 야로벤코는 포병 훈련을 위해 서부의 리비우로, 코텐코는 공수병이 되기 위해 남부의 오데사로 각자 떠났다.

야로벤코는 그렇지만 "매일 서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라면서 "모든 걸 다 터놓는 사이였다. 잘 지내는지, 지내는 곳에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든 이야기를 말이다. 우리는 절친한 사이였다. 늘 대화했다"라고 말했다.

세인트 피터 교회와 세인트 폴 교회에서는 요즘 거의 매일 장례식이 거행된다. 지역 군인들이 의식 절차를 진행한다
사진 설명, 세인트 피터 교회와 세인트 폴 교회에서는 요즘 거의 매일 장례식이 거행된다. 지역 군인들이 의식 절차를 진행한다

지난해 7월부터 10월 사이 이들은 잠시 재회했다. 코텐코의 부대가 리비우에 주둔했을 때였다. 두 청년은 훈련도 같이하고 주말엔 달리기도 함께 했다.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했다. 12월 31일에는 이들의 가족이 새해맞이를 위해 모이기도 했다고 했다.

그리고 약 한 달 후 남부 전선에 투입되기 전 코텐코는 리비우에 있던 야로벤코를 찾아왔다.

이 두 친구는 술을 조금 마시며 늦게까지 잠들지 못한 채 이야기를 나눴다. 우크라이나 국경을 따라 러시아군이 집결해 침공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리비우에선 일상이 지속됐고 그날 밤만큼은 전쟁이 먼일처럼 느껴졌었다고 했다.

다음 날 아침, 야로벤코와 작별 인사를 나눈 코텐코는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렇지만 그들은 매일 메시지를 주고받았다고 했다. 그러다 2월 26일, 코텐코에게선 더 이상 답장이 오지 않았다. 야로벤코는 최악의 상황을 두려워하다 결국 코텐코 부대의 지휘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친구가 박격포탄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야로벤코는 "아직 자세한 내용은 전해 듣지 못했다"라면서 "포격과 폭발이 있었고, 코텐코가 전사했다"라는 얘기만 안다고 했다.

코텐코는 마찬가지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카일로 모로즈 볼로디미로비치와 나란히 묻혔다
사진 설명, 코텐코는 마찬가지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카일로 모로즈 볼로디미로비치와 나란히 묻혔다

용기를 내 코텐코의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었을 땐 여전히 연락이 가능한 상태였다. 그는 짧게 코텐코가 사망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중에 장례식에 대해 말해주기 위해 전화를 걸었을 때는 이미 수미에 공중 포격이 심해져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계속 노력했지만 결국 닿지 못했다. 그래서 코텐코의 시신은 리비우로 옮겨져 가족들이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채 묻혔다. 리비우는 현재 포격에서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다.

야로벤코는 자신의 기지에서 교회까지 혼자 이동해 성인들이 모습이 그려진 아치형 천장 아래 교회당 회중석 옆에 홀로 서 있었다. 향을 태우며 나는 연기가 성직자와 추모객 위로 떠다녔다.

야로벤코가 서 있는 곳 옆으로 우크라이나 전사자들의 사진으로 가득한 게시판이 보였다. 처음에 목사들이 지난 2014년 이 교회 신자였던 전사자들을 기리기 위해 갖다 둔 사진을 보고 점차 많은 리비우 내 유족들이 자기 아들딸의 사진도 이곳에 갖다 두고 싶어 했다고 했다. 그렇게 점차 사진이 늘어났다.

교회의 브세볼로드 목사는 "유족들은 우리가 전사자를 위해 매일 기도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이곳에 사진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사한 군인 남녀를 명예롭게 매장하는 이 도시의 임무를 우리가 일부 담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용감했던 행동은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사자 사진이 붙은 게시판 앞에 선 브세볼로드 목사. 그는 "우리는 평생 이들을 기릴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설명, 전사자 사진이 붙은 게시판 앞에 선 브세볼로드 목사. 그는 "우리는 평생 이들을 기릴 것"이라고 말했다

브세볼로드 목사에 따르면 침공 전에는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군인의 장례식을 치렀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하루에 두세 명씩 매장한다고 했다. 최근에 사망한 사람 중 아직 게시판에 사진이 붙은 사람은 아직 없다고 했다.

코텐코의 사진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목사는 "그러나 이들의 사진도 여기에 걸릴 것이다. 만약 가족을 찾을 수 없다면 교회가 이들을 위해 사진을 붙일 것"이라고 말했다.

코텐코의 장례식이 있던 날, 교회로 관 3짝이 운구됐다. 이들 중 리비우 근처 마을 출신인 전사자의 가족과 친구들은 이날 교회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장례식 후 그를 고향으로 데려갔다. 나머지 관 2짝은 장례식 절차를 돕는 지역 부대 군인들에 의해 조용히 리차키우 공동묘지로 옮겨졌다.

리차키우 공동 묘지에서 코텐코의 관은 땅속에 묻혔다
사진 설명, 리차키우 공동 묘지에서 코텐코의 관은 땅속에 묻혔다

코텐코는 같은 부대 공수병인 카일로 모로즈 볼로디미로비치(25)와 나란히 묻혔다. 볼로디미로비치의 시신 역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두 청년은 1, 2차 세계 대전과 돈바스 친러 분리주의자들과의 전쟁에서 사망한 전사자들 곁에서, 공동묘지 가장 안쪽 구석에 묻혔다.

코텐코와 볼로디미로비치는 이번 전쟁으로 리차키우 공동묘지에 묻힌 4, 5번째 전사자라고 했다. 이들의 무덤가는 거의 비어있었지만 교회가 준비한 장미 한 다발과 국화 한 다발, 그들의 부대를 나타내는 표시가 놓여 있었다. 리비우 출신 병사들이 묻힌 다른 무덤 3곳은 꽃과 등불로 장식돼있었다.

다음 날 리차키우 공동묘지에는 2명이 더 묻혔다고 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엔 3명이 더 묻혔다. 이들의 이름이 새겨진 나무 십자가는 언젠가 이들에 대한 기억을 영원히 간직할 비석으로 대체될 것이다.

묘지 관계자는 "아직 이곳 리비우엔 전투가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조국을 지키다 전사한 군인들을 이곳에서 매장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바딤 야로벤코는 어릴 적 친구의 장례식을 보기 위해 혼자 이곳에 왔다. 그 또한 이제 최전선에 나가 싸울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사진 설명, 바딤 야로벤코는 어릴 적 친구의 장례식을 보기 위해 혼자 이곳에 왔다. 그 또한 이제 최전선에 나가 싸울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야로벤코는 여전히 코텐코의 부모님에게 연락하려 하고 있지만 연결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마 그들은 여전히 수미에 갇혀 있을 것이다. 러시아의 침략으로 부모는 아들을 뺏겼을 뿐만 아니라, 아들의 관이 땅에 묻힐 때 함께 있을 권리조차 빼앗겼다. 깊은 슬픔을 위로받을 수 있는 몇 안되는 기회였다.

코텐코의 관이 내려지자 야로벤코는 총을 발사하는 의장대 뒤편으로 물러섰다. 살면서 겪은 가장 슬픈 일이었다고 했다. "친구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묻히는 것을 보았다"라는 그는 묘지 관리인들이 연장을 정리하고 있을 때도 유일한 조문객이 된 채 홀로 서서 조용히 무덤을 바라볼 뿐이었다.

"전선에서 코텐코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던 그에게 이제 남은 것은 코텐코의 부모님과 곧 연락이 닿아 아들에 대한 기억을 전해 줄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야로벤코는 자신 또한 최전선에 나가 싸울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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