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 왜 일본 여성들은 파트너 동의 없으면 '임신중단' 의약품 처방 못 받나

일본에선 파트너의 동의가 있어야 낙태약을 처방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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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일본에선 파트너의 동의가 있어야 낙태약을 처방받을 수 있다.
    • 기자, 루퍼트 윙필드-헤이즈
    • 기자, BBC News, 도쿄

미국에선 여전히 '로 대 웨이드' 판결 번복으로 인한 격렬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는 와중에 일본에서도 소위 '의학적인 낙태 유도' 합법화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일본 후생노동성 고위 관료는 지난 5월 국회에서 영국의 제약회사 '라인파마 인터내셔널'의 경구용 임신 중절 약물을 최종 승인할 예정이라고 밝히면서, 여성들이 이 약을 처방받기 위해선 여전히 "파트너의 동의를 얻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여성의 낙태권을 지지하는 시민운동가들은 가부장적이며 시대에 뒤떨어진 규정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수술이 아닌 약물을 통한 의학적인 낙태 유도법은 34년 전 프랑스에서 합법화된 이후 영국과 미국도 1991년과 2000년 각각 승인했다.

이에 따라 유럽 내 여러 국가에선 가장 흔한 임신중단 수단이기도 하다. 일례로 스웨덴과 스코틀랜드에선 약물을 통한 임신 중지가 각각 전체의 90%, 70%를 차지한다.

그러나 일본에선 여성의 건강권과 관련된 약물의 사용 승인이 빨리 진행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일례로 일본의 인권 운동가들은 피임약 승인까지 30년이 걸린 것에 비해 남성 발기부전 치료제인 비아그라는 단 6개월 만에 승인됐다고 지적한다. 피임약과 비아그라 모두 1999년부터 일본에서 허가가 났으나, 비아그라 승인이 먼저였다.

그리고 여전히 일본에선 피임약을 둘러싼 제한이 많아 가격도 비싸고 복용하기도 어렵다.

이는 낙태가 합법이었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실 일본은 1948년에 세계 최초로 낙태를 합법화했다. 하지만 이는 '우생학보호법'의 일환으로 여성의 선택권 혹은 건강권과는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유전적으로 "열등한" 인간이 태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법이었다.

일본의 '우생학보호법' 제1조엔 "우생학적 관점에서 열등한 후손의 출산을 방지하고 산모의 생명과 건강도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나와 있다.

그러다 1996년에 이르러서야 '모체 보호법'으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개정됐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옛 법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어 여성이 임신을 중지하기 위해선 남편이나 파트너, 어떤 경우엔 남자친구의 서면 동의를 얻어야 한다.

미국에선 지난 6월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히면서 전국에서 시위가 촉발됐다

사진 출처, EPA

사진 설명, 미국에선 지난 6월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히면서 전국에서 시위가 촉발됐다

미나미 오타가 바로 이러한 경우였다.

오타는 남자친구가 성관계 중 콘돔 착용을 거부하면서 임신하게 됐다. 일본에선 여전히 콘돔이 주요 피임 수단이다. 그런데 오타가 임신 중지 동의 문서를 내밀었을 때 남자친구는 서명하길 거절했다고 한다.

"내가 남자친구에게 피임해달라고 부탁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는 오타는 "남자친구가 콘돔을 사용하고 싶지 않아 했기에 임신했는데도 여전히 낙태를 위해선 남자친구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제가 임신한 것임에도 타인의 허락이 필요했습니다. 이에 대해 무기력함을 느꼈어요. 제 몸과 미래에 대해 제가 결정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한편 미국과 달리 낙태에 대한 일본인들의 견해는 종교적 신념이 아닌, 길고 긴 가부장적인 역사 및 여성과 모성의 역할에 대한 전통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역사와 전통에 대해 오타는 "그 뿌리가 깊다"면서 "일본에선 여성이 임신하게 되면 더는 여성이 아니라 엄마가 된다. 한번 엄마가 된 이상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엄마가 돼 모든 걸 희생하는 건 아름다운 일로 여겨진다. 내 몸이지만 임신한 이상 내 몸이 아닌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일본에선 낙태약은 구하기도 어렵고 비용도 비싸다. 보통 병원에 입원해야 하기에 대략 700달러(약 90만원) 정도가 드는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의 의료기관은 여성의 건강을 위해 낙태 시 입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마에다 츠지오 '일본 산부인과 협회' 부회장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에선 낙태약 복용 후 병원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의료진이 환자의 상태를 관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영국 등 여러 나라에선 여성들이 집에서 혼자 낙태약을 복용해도 불법이 아니다.

츠지오 박사는 또한 "'모체 보호법'에 따르면 낙태는 반드시 의료 시설에서 시행돼야 한다. 그래서 현행법상 안타깝게도 처방전 없이 낙태약을 판매할 수 없다. 법에 어긋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여성 성 건강권 운동가들은 이러한 법률이 의학적 사실과는 별 상관이 없으며, 수익성 좋은 사업을 유지하려는 의료기관의 의도와 더 관련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에서 성 건강 관련 비정부 단체를 운영하는 소메야 아수카는 "(낙태와 관련된) 많은 결정이 나이도 많고 절대 임신하지 않을 몸을 지닌 남성들의 손에서 이뤄진다"고 의견을 밝혔다.

일본의 성 건강 운동가인 아수카
사진 설명, 일본의 성 건강 운동가인 아수카는 피임에 대한 여성의 결정권이 더욱 보장돼야 한다고 밝혔다

아수카는 여전히 남성 지배적인 일본 기득권층은 낙태에 대한 반감이 크다고 설명했다.

낙태를 쉽게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 낙태를 선택할 여성의 수가 늘어날 것이라는 논리로, 낙태 접근성을 낮추고 비용을 높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다른 국가의 사례에서도 나타나듯이, 낙태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으면 여성들의 선택이 제한되고 고통만 가중된다. 낙태가 어려워진다고 해서 원치 않은 임신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수카는 궁극적인 해답을 성교육 및 피임에서의 자기 결정권에서 찾고자 했다. 일본 여성들이 남성의 콘돔 착용에만 의존하기보단 더 통제권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유럽에선 피임 수단 중 피임약 복용이 가장 흔한 형태이나, 일본에선 피임약을 택한 여성은 3%에 불과하다.

아수카는 "소녀와 여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정책이 더 많아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기사에 등장하는 일부 인터뷰는 가명을 사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