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공연장 총기 난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연루설' 파헤치기

사진 출처, Getty Images
- 기자, 올가 로빈슨, 샤얀 사다리자데 & 폴 브라운
- 기자, BBC Verify
지난 22일(현지시간) 모스크바 외곽 크로커스 시청 공연장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 및 방화 사건에 대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급진적 이슬람주의자’들의 소행이라 인정했다.
그런데 ‘이슬람국가(IS)’가 해당 사건의 배후를 자처하며 영상 증거도 제기했으나, 여전히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연루설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BBC의 사실 검증 탐사보도 팀인 ‘BBC Verify’는 러시아 관료들의 성명, 언론 보도 자료, SNS 게시물 등을 통해 우크라이나 연루설이 어떻게 퍼지고 있는지 살펴봤다.
최초의 의혹 제기
이러한 의혹이 처음 SNS에 올라온 건 현지 시각으로 22일 오후 5시 15분으로, 공연장 공격 사건에 대한 최초 보도가 이뤄진 직후다.
사건 발생 약 1시간 만에 친정부 성향의 몇몇 블로거들과 관료들은 ‘텔레그램’을 통해 우크라이나 배후설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일례로 친정부 성향의 전문가 세르게이 마르코프는 22일 오후 6시 25분, 범인들이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처럼 보인다면서도 아무런 증거 없이 “우크라이나에서 조직한 공격일 가능성이 있다”고 제시했다.
그로부터 약 40분 뒤인 오후 7시 3분, 러시아 일간지 ‘모스콥스키 콤소몰레츠’는 군사 전문가 로만 슈쿨라토프의 말을 인용해 이번 공격이 우크라이나의 안보 및 군사 정보 기관의 지원을 받아 조직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오후 7시 27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전 러시아 대통령은 만약 우크라이나가 연루됐다면 복수해야 한다고 맹세했다.
책임자에 대한 거짓된 주장
그로부터 몇 시간 후인 오후 10시 13분, 러시아의 주요 TV 채널인 ‘NTV’는 우크라이나의 고위 관료가 우크라이나 개입설을 인정하는 모습이라며 한 영상 자료를 방영했다.
해당 영상에선 올렉시 다닐로프 우크라이나 국가안보보좌관이 마치 “오늘 모스크바에선 재미있었다. 정말 재미있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더 자주 마련할 수 있으리라 믿고 싶다”고 말하는 듯 하다.
그러나 BBC Verify팀은 해당 영상이 지난주 우크라이나 방송국이 방영한 별개의 인터뷰 영상 2개를 합성해 편집한 것임을 밝혀냈다.

사진 출처, NTV
두 인터뷰 영상 모두 현재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 번째 인터뷰는 이번 달 19일 다닐로프가 등장하는 인터뷰이며, 또 다른 영상은 키릴로 부다노프 우크라이나 국방정보국장이 인터뷰하는 모습으로 이보다 3일 전인 16일 공개됐다.
NTV가 방영한 다닐로프 보좌관의 발언은 원본 인터뷰에선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다.
영국 리버풀 존 무어스 대학교의 ‘첨단 법의학 기술 연구 그룹’은 BBC Verify팀을 위해 영상 음향을 분석해봤다. 그 결과 NTV가 방영한 영상은 소리가 조작된 것으로 나타났다.
해당 영상의 음향 주파수를 살펴본 결과 일정하지 않았는데, 이는 소리가 편집됐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러나 연구진은 목소리의 AI 생성 여부는 판단할 수 없다고 했다.
아울러 BBC Verify팀이 오디오 파일 속 정보를 살펴본 결과 편집 소프트웨어를 거쳤음을 보여주는 흔적도 찾을 수 있었다.
월경을 위한 '창구'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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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다음 날인 23일, 푸틴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공식적으로 이러한 의혹을 제시했다.
범인들은 우크라이나로 도주하던 중 체포됐으며, 우크라이나에서 “이들의 월경을 위한 창구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측은 범인들이 도주할 수 있는 이러한 “창구”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진 않았다.
BBC Verify팀은 범인들이 사건 후 어디로 도주 중이었는지 확인할 순 없었지만, 이들이 체포되는 장면이 담긴 영상 및 다수의 사진을 살펴봤다.
그런데 푸틴 대통령의 주장과는 달리 이들이 체포된 곳은 우크라이나-러시아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이었다. 영상 속 배경을 살펴본 결과, 용의자 2명의 체포 장면은 우크라이나와 국경에서 약 145km 떨어진 곳에서 촬영됐음을 확인했다.
우크라이나가 그 어떠한 연루설도 부인하고 있는 가운데 IS는 자신들의 선전 매체인 ‘아마크 뉴스 통신’을 통해 이번 사건의 배후를 자처하고 나섰다.
IS가 유포한 자료엔 얼굴이 흐릿하게 처리된 범인 4명이 담긴 영상, 범인 중 한 사람의 시점에서 촬영된 매우 생생한 영상도 포함돼 있다. 그리고 공연장 내부의 모습, 범인들이 사용한 총기 등 실제 사건 현장과 여러 부분이 일치한다.
그런데 이러한 증거에도 러시아는 계속해서 우크라이나를 비난하고 있다.
러시아 TV 채널 ‘RT’의 마르가리타 시모니안 편집장은 X(구 ‘트위터’)에서 범인들이 자살폭탄 조끼를 입고 있지 않아 “죽을 의도가 없었기에” IS의 소행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IS가 테러리스트들에게 생포되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지만, 이전에도 IS의 범인들이 현장을 탈출한 적이 있다.
일례로 BBC 모니터링팀이 살펴본 IS 측 선전 미디어에 따르면 지난 2022년 말, 아프가니스탄 카불 소재 한 호텔에서 발생한 공격에 연루된 한 대원은 현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고, 이후 자살 공격을 감행했다고 한다.
용의자들에 대해 알려진 바는?
범인들은 체포되기 전 흰색 르노 차량을 운전하고 있었는데, 이는 공연장을 탈출하는 모습을 담은 별도의 영상 속 차량과 일치한다.
알렉산더 킨슈타인 러시아 연방하원 부의장에 따르면 용의자 1명은 해당 차량 근처에서 체포됐으며, 나머지 3명은 근처 숲으로 도주했으나, 수색 끝에 붙잡혔다고 한다.
킨슈타인 부의장은 무기와 타지키스탄 여권이 해당 차량에서 발견됐다고도 덧붙였다.
한편 지난 24일엔 모스크바 법정으로 끌려오는 남성들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 공개됐다. 러시아 당국이 밝힌 용의자 4명의 이름은 달레르존 미르조예프, 사다크라미 무로달리 라차발리조다, 샴시딘 파리두니, 무하마드수비르 파이조프다.

IS가 공개한 영상 속 용의자 중 3명은 각각 밝은 갈색, 연두색, 회색 티셔츠를 입고 있다. 그리고 이는 용의자 3명의 체포 당시 옷차림과 일치해 보인다.
예를 들어 라차발리조다로 확인된 남성이 입은 연갈색 티셔츠의 로고 2개는 IS가 공개한 영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남성은 심문 중에도 자신의 이름이 라차발리조다라고 밝힌다.

IS가 공개한 용의자 4명의 영상에서 유일하게 상의 색깔이 확인되지 않는 인물인 미르조예프는 긴팔 초록색 셔츠와 청바지, 검은색 벨트 차림으로 체포됐다. 이는 IS 영상에 등장하는 총격범의 차림새와 동일하다.

배후 자처하는 IS의 주장은 신빙성 있나?
범인들이 공격을 자행하는 동안 촬영한 매우 생생한 영상의 존재, 영상 속에 IS 테러범들이 주로 사용하는 구호가 등장한다는 점, 해당 영상이 IS 공식 선전 채널을 통해 공개된 점 등은 지금껏 알려진 IS의 공격 전후 수법과 일치한다.
한편 이번 사건이 발생하기 2주 전 용의자 중 1명이 크로커스 시청 내부에 있었던 사진이 러시아 언론을 통해 공개됐는데, 이를 통해 사전 계획된 범죄임을 짐작할 수 있다.
IS는 범인들의 생사를 확인한 이후 배후설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 범인이 사망하면 국가의 정보 당국이 심문 혹은 고문을 통해 정보를 빼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범인들이 아직 생존한 상태에서 배후를 자처하는 건 드문 일로, IS가 얼마나 이번 일이 자신들의 짓임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싶어 하는지 보여준다.
사실 IS가 러시아를 공격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IS는 지난 2015년과 2018년 러시아를 노린 대규모 공격이 자신들의 짓이라고 주장했으며, 최근 몇 년간만 해도 다른 소규모 공격을 이어왔다.
추가 보도: 미나 알라미, 베네딕트 가먼, 아담 로빈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