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같았던 그곳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생존자의 고백

- 기자, 이래현
- 기자, BBC 코리아
"선감학원은 고독한 지옥이었어요."
김춘근(76) 씨는 10살의 어린 나이에 이미 모든 꿈을 포기했다.
계모의 구박을 피해 도망치듯 들어간 큰아버지 집에서도 정착하기 어려웠던 그는 거리를 서성이다 순찰 중이던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관이 무조건 잡더라고요. 도망갈까 봐 내 목덜미를 잡고 안 놓아요. 내 집이 여긴데, 내가 뭘 잘못했냐고 막 울었어요. 그랬더니 발로 엉덩이를 막 차는 거야. 좋은 데가 있는데, 거기 있으면 공부도 시켜줄 테니 가자고."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가 들어간 곳은 바로 악명 높은 선감학원이었다.
애초 이름은 선감원. 일제강점기 말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도에 세워진 수용소로 소위 부랑자 감화를 내세워 강제노역과 강제징용도 이뤄졌다.
해방 이후 관리권이 경기도로 이관되면서 선감학원으로 이름을 바꾼 뒤에도 여전히 '부랑아 수용시설'로 활용됐다. 특히 당시 경찰은 경찰력을 동원해 서울 시내의 부랑아, 고아, 거지를 잡아들였다.
이후 1982년 선감학원이 폐지되기 전까지 40여 년간 수많은 소년들이 이곳에서 혹독한 강제노동에 동원됐다. 노동력 착취와 심한 폭력 등 인권 유린이 남발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소년들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의 유해발굴 조사 결과, 숨진 소년들은 암매장된 것으로 밝혀졌다.
한 번 들어오면 도망칠 수 없는 섬

사진 출처, 국가인권위원회
당시 10살이었던 김 씨는 선감학원에 들어오자마자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전깃불도 없어. 깜깜한 지옥이야. 뭘 먹을 수도 없어서 애들이 생식하러 다녔어요. 풀뿌리 뽑아 먹고, 밭 가서 배춧가랑지 주워 먹고. 배고프니까."
식사로 나온 국물은 짠맛만 가득한 소금국이었고, 어느 날 배식 받은 새우젓에선 구더기가 나오기도 했다.
매일 이유 없는 기합과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좀 부당하게 많이 때리고 그랬어요. 하나가 잘못하면 전체적으로 맞는 거예요. 150대를 맞고 엉덩이 한쪽이 없어진 애가 있더랬어요. 뭘 잘못했는지 모르지만."
서로 간 싸움을 시키기도 했다. 때리고 맞더라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선감학원에 들어간 아이들은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했다.
어느 날 그는 선감학원에서 탈출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원생 두 명과 함께 어두운 밤에 도망을 쳤다.
하지만 섬에 위치한 탓에 탈출은 순탄치 않았다. 배를 타고 겨우 산을 넘어 도착한 인근 마을에서는 선감학원 도망자 신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숨어 지내야 했다.
결국 스스로 탈출을 포기하고 어두운 밤을 틈타 다시 제 발로 기숙사에 돌아갔다.
그는 실제로 선감학원에서 탈출을 시도했다가 매를 맞는 일은 부지기수였다고 했다.
탈출하던 중 목숨을 잃는 아이들도 있었다. 김 씨는 어느 추운 겨울에 12명이 한 번에 도망간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중 한 아이가 얼어 죽은 채로 바닷가에서 발견됐다.
“애가 땡땡하게 얼었더라고요. 그래서 불을 피워서 녹이고, 산에다가 묻었어요.”
1m 길이의 땅에 묻힌 아이들

사진 출처, NEWS1
선감학원 탈출을 시도했던 이가 총 834명이란 기록이 있지만, 실제 몇명이 탈출에 성공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조수간만 차가 큰 서해안의 특성상 밀물을 만나 익사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진실화해위는 앞서 지난 10월 선감학원 유해발굴 현장을 공개했다. 약 한달 간의 조사 결과 총 40여 기의 분묘 발굴을 통해, 치아 210점과 유품 27점을 수습했다고 진실화해위는 밝혔다.
폭이 채 1m도 되지 않은 가장 작은 봉분에는 여섯 살 정도의 어린이가 묻혔던 것으로 추정됐다.
진실화해위는 앞서 2022년 9월26일에서 30일까지 같은 지역에서 5일간 시굴조사를 해 5개의 봉분에서 선감학원 아동의 것으로 추정되는 치아와 단추 등을 수습한 바 있다.
공식 집계된 사망자는 24명. 하지만 김진희 진실화해위 선감학원 조사팀장은 “더 많은 아동이 탈출 과정에서 사망했을 거로 추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선감학원에서의 22년

탈출을 포기했던 김 씨는 “배운 것도 없고 나가봐야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차라리 여기서 농사나 짓고 지내야겠다”라고 생각했다.
함께 지낸 원생들을 아침에 깨우고, 구보를 뛰는 등 학원 내 성실한 생활로 눈에 띈 그는 이곳에서 원장의 주선하에 결혼도 했다.
그때부턴 ‘원생’이 아니라 ‘직원’에 가까웠다.
1969년부터 1972년까지 기숙사 관리인직을 맡아 100여 명의 사생들을 관리했다. 김 씨는 선감학원에서 가장 오래 지냈던 원생이자, 근무자다. 그리고 한때 피해자였던 그도 그 ‘지옥’에선 누군가의 가해자가 됐다.
기숙사를 관리하는 동안 부당한 일을 지시하는 이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말리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관리자 역할을 한 김 씨를 원망하는 이들도 있다.
"나한테도 그런 질문이 들어와요. 지금 우리끼리 모임을 하잖아요. 그럼 ‘나 춘근이 형한테 매 맞았다.’ 이래요. 네가 뭘 잘못해서 내가 때린 거니, 물어보면 때린 사람은 생각 못 한다고 막 그래요."
무려 22년간 선감학원에 몸담았던 그는 학원이 폐쇄되던 1982년, 32세가 되던 해에 사회로 나왔다.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했던 그는 일용직을 하며 생계를 유지해 왔다.
현재 기초생활수급자인 그는 “배우지 못한 것”이 가장 억울하다고 말했다.
"우리 생존자 중 잘 사는 사람이 없어요. 머리에 들어간 게 있어야 어디 공장이라도 들어가서 일하는데, 그러니까 일을 못 하는 거예요. 그때 그 소년들의 미래가 선감도에서 어떻게 보면 끝났다고도 볼 수 있죠."
그는 선감학원 생존자 대부분이 글을 쓸 줄 모른다고 말했다.
"뭘 알아야 뭘 한다고 그러잖아요. 나도 지금 75세지만 운전면허 좀 따려고 해도 못 땄어요. 한글을 못 읽으니 창피스럽고 누구한테 알게 해달라고 할 수도 없고."
현재 선감학원 부지에는 선감역사박물관이 있다. 여느 피해자들처럼 선감도 쪽은 쳐다보기조차 싫었다던 김 씨는 역사 해설사로 이곳에서 자신의 아픈 기억을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 한다.
"우리 생존자 중에서 선감도에 살았다는 걸 (주변에) 얘기조차 안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알면 창피할까 봐. 그래서 숨기고 있다가 이제 이렇게 진실이 밝혀지니까 (자녀들도) ‘우리 아빠가 이런 데 와서 고생했겠구나’ 하고 놀라더라고요."
'누구도 책임 지지 않았다'

사진 출처, NEWS1
앞서 선감학원 아동 인권침해 사건의 피해자 167명은 2020년 12월 10일 진실화해위에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진실화해위는 2021년 5월 조사를 시작했고 이듬해 10월 18일 1차 진실규명 결정을 통해 행정안전부와 경기도에 예상 암매장지 6곳 전면 발굴, 유족에게 공식 사과 등 후속 조치를 권고했다.
이에 경기도지사가 나서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처음으로 위로금을 지급하는 등 지원에 나섰다. 그러나 애초 사건 당시 공권력을 중심으로 사건이 행해졌음에도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사과는 찾아볼 수 없다.
진실화해위는 추가 조사를 통해 오는 3월 중으로 선감학원 사건에 대한 2차 진실규명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어떤 보상을 기대하냐는 질문에 김 씨는 "어느 정도 살게끔 해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앞으로는 이런 시설이 생기지 않아야 한다는 바람이죠. 나라에서는 우리를 가둬놓고 노예를 시켰으니까, 우리가 보상해달라고 그러는 거예요. (경기도에선) 해줄 수 있는 데까지 다 해주겠다고 대답은 해놨어요. 우리 집 없는 애들도 많아요. 여기 (터에) 쉼터라도 좀 해줬으면 하는 그런 바람이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