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복지원: 40년 전 부산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 기자, 정부경, 최정민
- 기자, BBC 코리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이른바 과거사법 개정안이 지난 20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였다. 한종선 씨는 방청석에서 표결을 지켜보며 울었다고 했다. 그는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생존자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앞둔 1980년대 초반 '사회 정화' 명목의 부랑자 단속은 전두환 정권의 주력 사업이었다.
사설 사회복지 기관들이 정부 보조금을 받고 부랑자 수용을 맡았다. 부산 형제복지원도 그 중 하나였다. 걸인, 소매치기, 노숙인 등이 단속 버스에 실려 형제복지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형제복지원을 거쳐 간 사람들은 이들만이 아니었다. 1987년 당시 야당 신민당의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평범한 시민과 어린이까지 강제 수용됐다. 시설 안에선 강제 노역과 구타, 성폭행도 벌어졌다. 그러나 아무도 이같은 인권 침해 행위에 책임을 지지 않았다.
40년 전 부산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BBC 코리아가 한 씨 등 관련자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되짚어 봤다.
주의: 일부 불편한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평범했던 삶이 무너졌다

한 씨는 1984년 가을, 가족들과 시내 나들이에 나섰다가 누나와 함께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갔다. 그는 여덟 살, 누나는 열한 살이었다.
한 씨는 "부자는 아니었어도 평범한 가족이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부산역 근처에서 구두방을 했어요. 학교를 마치면 누나 손을 잡고 아버지 일터까지 걸어가서 용돈도 받아오고, 아버지 일도 돕곤 했죠. 그날은 아버지가 일을 쉬는 날이었습니다. 같이 시내 구경을 하다 아버지가 급히 처리할 일이 있다며 파출소에 저랑 누나를 앉혀 놨어요. '잠깐만 앉아 있으라'고 했죠."
얼마 지나지 않아 형제복지원 차량이 파출소 앞에 섰다. 한 씨는 "차에서 내린 이들이 경찰과 사인을 주고 받더니 우리 남매를 강제로 차에 태웠다"고 회상했다.
"아버지 곧 오신다고 울고불고 하는데 '너무 시끄럽게 운다'고 두들겨 팹디다. 이후 3년 6개월간 하루도 안 빠지고 맞았습니다."
또다른 피해생존자 최승우 씨는 당시 13살이던 1982년 학교에서 돌아오던 길에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관 하나가 저를 잡더니 경찰서로 데리고 들어갔어요. 가방을 뒤지더라고요. 학교에서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주는 빵이 있었거든요. 받아서 절반은 먹고 나머지는 가방에 넣어 놨었어요. 그 빵을 보더니 '이거 어디서 훔쳤냐'고 하더라고요."
최 씨는 "경찰이 자백을 강요하며 성기를 고문했다"며 "집에 가고 싶어서 '훔쳤다'고 말한 게 형제복지원 생활의 시작이 됐다"고 말했다. 최 씨는 4년 8개월간 수용됐다.
구타와 성폭력
최 씨는 입소 첫날 정신병동에 들어갔다고 했다.
복지원 내 입소자들은 군대식 '소대'로 분류됐다. 복지원 측이 입소자들 중 소대장을 선발했다. 이렇게 뽑힌 소대장들은 다른 소대원들에게 권력을 행사했다.
"소대장이라는 사람하고 선도원들이 옷을 다 벗기더라고요. 찬물을 막 끼얹더니 '아침이 되면 집에 보내줄 테니 거기 누워 있으라'고 했어요."
그날 밤, 소대장은 다시 최 씨를 찾아왔다고 한다.

"옷을 다 벗고 벌벌 떨고 있는 저를 강간했습니다. 살려 달라고 빌었어요. 신입 소대로 옮겨지기 전까지 3일 연속으로 그 사람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
최 씨는 "열흘 사이 사람 두 명이 죽어나가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이 정신병동에 있던 사람을 죽도록 패면서 끌고 가더라고요. 사람이 눈이 돌아가고 피가 질질 흐르는 데도 그냥 끌고 가는 걸 보면서 '여기는 사람이 죽는 곳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소대장에게 '왜 우리를 가두는 거냐' '우리가 왜 맞아야 하느냐'고 질문한 남성은 담요에 말린 채 소대장과 소대원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했다고 했다.
"사람이 거품을 물고 쓰러지니까 담요에 돌돌 말아서 데리고 나가더라고요. 그 사람은 다시 복지원으로 돌아오지 않았어요.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깨달았죠."
한 씨의 증언도 비슷하다. 그는 "구타와 기합을 받던 중 장애가 생길 정도로 뼈가 부러지거나 머리가 터져 뇌사 상태에 빠진 사람들도 있었다"고 주장했다.
한 씨에 따르면 2층짜리 벙커 침대 한 층에 4명씩 지그재그로 누워 잠을 잤다. 밤마다 성폭행이 빈번하게 벌어졌다고 한다.

사진 출처, 한종선
그는 "복지원에서 지급받은 건 푸른색 운동복 한 벌과 고무신, 나일론 속옷이 전부였다"며 "제대로 씻지 못해 몸엔 늘 이가 득실거렸다"고 했다.
형제복지원은 '부랑자들이 입소하면 1년간 교육시켜 사회로 다시 내보낸다'고 홍보했다.
그러나 부산시가 진행한 형제복지원 피해자 실태조사 연구용역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 149명의 평균 수용 기간은 1109일이었다. 이들 중 25%는 5년 이상 수용됐다.
응답자 86%는 "강제노역을 강요 받았다"고 했다. 수용자들은 농장과 건축 공사 현장 등에 투입됐다.
강제노역 의무는 입소 당시 여덟 살로 나이가 가장 어렸던 한 씨에게도 부여됐다. 그는 "봉투 접기, 과일 요지 만들기, 볼펜 심 끼우기, 장난감 총 조립하기, 낚시바늘 만들기 등 여러 생산 활동을 했다"고 증언했다.
공권력 개입 근거는 '유신시대 훈령'
1981년 4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남덕우 국무총리에게 특별 지시를 내렸다. "신체 장애자의 구걸 행각이 늘어나고 있는 바, 실태를 파악해 단속 및 보호 조치를 하고 대책과 결과를 보고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곳곳에 부랑인 신고 센터가 세워졌고 '부랑인 수송 차량'이라고 써진 버스들이 도심에 나타났다.
1987년 신민당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이같은 부랑인 단속의 주체는 경찰과 일반 공무원이었다. 1986년 기준 전체 수용자 3975명 가운데 3117명이 경찰의 알선으로 보호시설에 넘겨졌다.

이처럼 공권력 개입이 가능했던 배경엔 내무부 훈령 410조가 있었다.
1975년 지정된 이 훈령은 부랑자의 신고와 단속, 수용, 보호 관련 지침을 담고 있다. 그러나 지침 속 '부랑자'의 범위가 명확하지 않아 단속 담당자들이 훈령을 자의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컸다.
신민당 조사단은 형제복지원에서 500여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했다. 또 부랑인 단속 및 수용 과정에서 약취와 유인, 체포, 감금, 폭행, 상해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했다.
탈출
수용자들은 종종 탈출을 시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탈출 작전에 '실패'라는 선택지는 없었다. 한 씨는 "사람들이 비밀리에 탈출을 도모해도 언제나 내부 고발자가 등장했다"고 설명했다.
부산시 실태조사에서 심층면접을 맡은 경희대 박숙경 교수는 "수용자들 가운데 소대장을 지정하고, 수용자들을 집단으로 묶어 한 사람이 잘못하면 소대 전체가 벌을 받게 하는 체계는 수용자들끼리 서로를 감시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형제복지원에서 사람이 죽어 나간다'는 소문이 부산에 퍼지던 1986년, 수용자 30여 명이 집단 탈출에 성공하면서 형제복지원의 실상이 드러났다.
검찰 수사가 본격화 된 이듬해 형제복지원은 문을 닫았다. 한 씨는 이때서야 형제복지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다른 복지원으로 옮겨졌다.
함께 입소했던 누나가 아버지와 함께 정신병원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2007년이었다. 아버지 역시 남매가 사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아 형제복지원으로 끌려왔다고 했다.
중학생 때 입소한 최 씨 역시 여러 번 탈출을 모색했다고 한다.
"정신병동 구석에 숨어 빠져나갈 기회를 엿보기도 하고, 산속으로 뛰어 들어가 탈출하려고도 했습니다. 매번 잡혔어요. 잡혀 들어오면 두드려 맞았습니다. 살아서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밖엔 없었습니다."

그는 가족들의 노력으로 1986년 10월 형제복지원을 탈출할 수 있었다. 그의 동생까지 붙잡혀 온 이후였다.
"형제복지원 관련 소문이 도니까 할머니가 아버지에게 '아이들이 저기에 있지 않겠느냐'고 하셨대요. 그래서 아버지가 찾아오셔서 '내 자식 내놔라!' 난리를 치신 거죠. 그제서야 복지원 사람들이 마지못해 동생과 절 풀어줬어요."
최 씨의 동생은 2009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최 씨는 "동생이 트라우마로 괴로워했다"고 했다.
복지원장은 '징역 2년 6개월형'
원장 박인근은 재판에 넘겨졌다.
당초 박인근에게 적용된 혐의는 특수감금죄와 폭력 행위, 횡령죄 등이었다. 그러나 7차례에 걸친 재판 끝에 횡령 및 초지법 위반 등 수용자 인권 침해와는 관계 없는 혐의만 인정돼 징역 2년 6월이 선고됐다.
그는 2016년 지병으로 사망했다.
2018년 10월 법무부 검찰 과거사 위원회는 수사에 외압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조사단은 1987년 수사 당시 박희태 부산지검장과 전두환 대통령의 압박이 있었다는 검사 진술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약 한 달 뒤, 당시 문무일 검찰총장은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을 찾아 "검찰이 인권 침해의 실상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했다"면서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다. 대법원에 이 사건에 대한 비상상고도 신청했다.

사진 출처, 최승우
지난 20일 과거사법 통과로 형제복지원 사건 재조사도 가능해졌다.
국회 앞에서 형제복지원 재조사를 촉구하며 수 년간 농성을 벌여온 한 씨와 최 씨의 얼굴에 오랜만에 웃음꽃이 핀 날이었다.
이튿날 문재인 대통령은 "1987년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으로 진상조사 작업에 참여했지만 시설이 폐쇄돼 진상규명을 제대로 하지 못해 항상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남아있다"며 "진실이 꼭 밝혀지길 고대한다"고 말했다.
삽화: 한종선 씨의 그림을 BBC 데이비스 수르야 기자가 재구성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