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동성애 금지법 조항 역사의 뒤안길로

에스플러네이드 공원 내 '나무 5그루의 발'을 보여주는 러셀 헝
사진 설명, 에스플러네이드 공원 내 '나무 5그루의 발'을 보여주는 러셀 헝
    • 기자, 테사 웡
    • 기자, BBC News, 싱가포르

싱가포르의 조용한 에스플러네이드 공원에서 만난 러셀 헝(71)은 자신이 과거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경찰에 붙잡혔던 장소를 가리켰다.

크게 특별해 보이지 않는 나무 그늘이었지만, 인터넷과 그라인더(동성애자들을 위한 데이트 애플리케이션)가 발달하기 전인 1980년대 이곳은 싱가포르 남성 동성애자들에게 만남의 장소로 인기였다고 한다. 동성애가 사실상 범죄화되던 시절이었다.

'나무 5그루의 발'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엔 우뚝 솟은 레인트리가 그늘을 만들어줘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조금은 숨을 수 있었다는 게 헝의 설명이다.

그는 각본가 및 사회 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헝은 "그날 밤 우리는 공원에서 걸어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복 경찰이 우리를 향해 큰 소리로 소리치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경찰관이 맹렬히 호통을 치자 거기 있던 남성들은 일렬로 줄을 서야만 했고, 그 "경찰관은 '너희 모두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고 소리쳤다"는 설명이다.

헝은 "우리는 단지 공원을 걷고 있었을 뿐"이라면서 "그런데 뭔가 심리적으로 잘못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 결국 그건 괴롭힘이었다"고 설명했다.

싱가포르엔 영국 식민지 시절에 제정된 형법 377A 조항이 독립 이후에도 논란 속에 수십 년간 남아있었다. 두 남성 간의 성관계를 금지한다는, 사실상 '동성애 금지법'이었다.

지금껏 당국은 동성애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회 시각을 반영한 법률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리셴룽 총리가 국민들의 태도 변화를 이유로 이러한 금지법을 폐지한다는 발표한 지 몇 달만인 지난주 의회는 해당 조항을 공식적으로 폐지한다고 밝혔다.

377A 조항이 폐지되면서 싱가폴 동성애 역사의 어두웠던 시기는 과거로 남게 됐다. 동성애자들에게 사회적 낙인은 물론 당국의 적극적인 감시가 따라붙었던 시기였다.

한편 에스플러네이드 공원에서 경찰에게 붙잡힌 헝과 다른 남성들은 경고만 받고 풀려났지만, 이들처럼 모두가 운이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수십 년간 싱가폴 경찰은 남성 동성애자들이 자주 다니는 나이트클럽이나 해변 및 공원 산책로를 주로 겨냥한 "반 동성애" 급습 작전을 펼치곤 했다. 게다가 동성애자 남성들에게 인기 있는 만남의 장소에서 경찰관이 동성애자인 척 위장해 관련자들을 현장에서 체포하는 등 함정 수사를 벌이기도 했다.

이렇게 체포된 이들은 보통 매춘, 추행 또는 외설 행위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그리고 언론 매체는 이들의 이름, 나이, 직업을 나열하며 이들의 체포 경위에 대한 세부 사항을 전국적으로 보도했다.

이후 대부분은 벌금을 내고 풀려나거나 몇 달간 수감됐지만, 1993년 "포트 로드 급습"으로 알려진 사건과 같은 일도 발생했다. 포트 로드라는 지역에서 체포된 남성들에게 악명높은 태형이 선고된 것이다.

이후 이어진 항소에서 이 남성들이 체포 및 기소된 방식이 "적절치 않다"는 판사의 판단과 함께 태형 판결은 뒤집혔다.

그러나 많은 남성 동성애자에게 이는 자신들의 존재가 사회적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는 분명한 메시지로 다가왔다.

철저하게 통제된 사회인 싱가포르이기에 반동성애적 폭력 사건이 자주 발생하진 않았지만, 동성애자들은 친구나 가족에겐 물론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 자신이 동성애자임이 밝혀지진 않을지 두려움에 떨었다.

헝은 "언제나 조심해야 했고, 경찰 조사 낌새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두려워해야 했다"면서 "당시 남성 동성애자라면 본능적으로 이런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다 2000년대에 이르러 급습 작전은 줄어드는 한편 한 때 금기시되던 동성애 담론이 공개적으로 행해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07년 의회는 377A 조항을 둘러싼 기념비적인 토론을 펼쳤고, 그 결과 싱가폴 정부는 해당 조항을 폐지하진 않지만 집행하지도 않겠다는 약속을 내놨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엔 싱가포르 국민들의 태도 변화를 꼽을 수 있다. 느리긴 하지만 싱가폴 사회는 점차 동성애자들을 사회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최근 설문 조사에 따르면 여전히 동성애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비율이 상당하긴 하지만, 동성애자들의 권리를 지지하는 비율 역시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동성애자에게 우호적인 기관과 정책들이 늘어나며 이들이 다양성 촉진 정책을 추진하자 싱가폴 내 동성애 담론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됐다.

일례로 대규모 시위와 정치 집회가 엄격히 규제된 싱가포르이지만, 성소수자 활동가들이 개최하는 '핑크 닷' 집회에는 매년 수만 명이 몰려든다. '핑크 닷' 집회는 싱가포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시민 사회 주도 집회가 됐다.

또한 더 많은 로비 단체와 지원 커뮤니티가 등장하면서 동성애 인권 운동은 더욱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동성애자 권리 옹호 단체가 존재하기조차 어려웠던 시기와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헝은 싱가포르에서 가장 오래된 동성애자 단체 중 하나인 '피플 라이크 어스'의 창립 멤버로, 1990년대 단체 등록을 2번이나 거부당했다.

초기 '피플 라이크 어스' 사람들은 당국의 밀착 감시 대상이었다. 사복 경찰관들은 이들 단체의 공개 회담 장소까지 와 사람들의 신원을 확인했다는 게 헝의 설명이다.

헝은 "'핑크 닷' 집회가 사회적으로 그냥 받아들여지던 시기에 태어난 청년들은 동성애자들도 괜찮다는 걸 그냥 이를 사회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지금과 달랐던 시기가 있었던 걸 모른다"고 덧붙였다.

한편 사람들이 과거를 잊지 않길 바라는 이들도 있다.

어느 저녁 싱가폴 시내에서 독특한 투어를 하는 관광객 무리를 만났다. 이삭 텅(34)이 이들을 이끌고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이삭 텅은 싱가포르 동성애 초기 역사와 관련된 장소를 걷는 투어를 생각해냈다
사진 설명, 이삭 텅은 싱가포르 동성애 초기 역사와 관련된 장소를 걷는 투어를 생각해냈다

싱가포르 리버에 서서 텅은 관광객들에게 성매매에 뛰어든 19세기 중국 출신 남성 이민자들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어느 평범한 사무실 건물로 이동했다. 싱가포르에서 최초로 동성애자 남성들을 위한 사우나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이후 언덕 위에 있는 어느 고급 식당으로 들어섰는데, 이곳 또한 한때 남성 동성애자들이 자주 모이던 장소였다는 설명이다.

텅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싱가폴 사회 특히 청년들이 동성애 역사를 잊는 "기억상실증"을 겪고 있음을 깨달은 뒤부터 이러한 동성애 역사 투어를 시작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텅의 이 특별한 투어엔 동성애자 및 이성애자 관광객들도 몰린다.

텅은 377A 조항이 실제 집행되지 않게 되면서 "한 번도 해당 법의 표적이 된 적이 없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377A 조항 폐지 운동 등 해당 법이 세간의 이목을 끌면서 "훨씬 관심도 늘어나고 사람들도 (동성애 역사에 대해) 더 궁금해한다"고 덧붙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관심을 충족시킬만한) 자원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설명이다.

텅의 이 특별한 투어엔 동성애자뿐만 아니라 이성애자 관광객들도 몰린다
사진 설명, 텅의 이 특별한 투어엔 동성애자뿐만 아니라 이성애자 관광객들도 몰린다

한편 이번에 폐지 결정이 나면서 377A 조항은 이제 공식적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그러나 동성애자 커뮤니티는 이를 축하하면서도 신중한 입장이다.

해당 조항은 폐지됐지만, 동시에 결혼을 남성과 여성의 결합으로 규정함으로써 동성 간 결혼의 가능성을 사실상 배제하는 헌법 수정안도 표결을 통해 통과됐다.

투표 과정에서 몇몇 의원들은 "공격적인 동성애자들"이 있다는 우려와 함께 종교의 자유가 침해될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놨다. 이에 대해 동성애자 인권 단체는 "근거 없는 말과 공포 조장"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텅은 "몇몇 의원들은 마지못해 377A 조항을 폐지했다. 그렇기에 앞으로 동성애자 권리 옹호가 더 까다로워지리라 전망한다. (이번 폐지 결정은) 주요 성과라기보단 타협에 가깝다"고 심경을 전했다.

한편 헝은 "(폐지 결정이) 정말 기쁘다. 그러나 너무 오래 걸렸기에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고 언급했다.

"동성애자인 어떤 친구가 이렇게 비유했는데 정말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테이블 위에 남겨진 맛있고 뜨거웠던 커피 한잔'이요."

"그 커피를 지금 마시고 있는 셈이죠. 여전히 커피이고, 커피 맛이 나지만, 이젠 식어서 차가워진 커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