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갑질: '제가 설거지하려고 회사 오는 건 아니잖아요'

대구 한 은행에 근무했던 김선아(가명)씨는 점심시간 1시간 동안 식사 준비부터 마무리까지 도맡아 했다고 토로했다

사진 출처, Getty Images

사진 설명, 대구 한 은행에 근무했던 김선아(가명)씨는 점심시간 1시간 동안 식사 준비부터 마무리까지 도맡아 했다고 토로했다

3년 전, 20대 후반의 나이에 대구의 한 은행에 일반 사원으로 입사한 김선아(가명)씨는 드디어 업계에 발을 내디뎠다는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건 업무뿐만 아니었다. 설거지 등 업무와 무관한 일까지 막내이자 여직원인 그의 몫으로 떨어졌다.

"은행 사람들은 도시락을 싸서 다녔는데, 밥 먹기 전 수저를 놓는 등 테이블 세팅부터 시작해서 식사가 끝난 후 각자의 도시락을 설거지하는 일까지 제 몫이었어요. 식사 준비부터 뒷정리까지 하고 나면 1시간 남짓한 점심시간이 끝나있었고요."

그는 은행에 근무한 약 7개월 동안 점심시간을 제대로 가져본 적이 없다고 토로했다.

업무 중 간식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설마 내가 먹지 않은 것까지 나보고 치우라고 하진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식사나 간식 자리를 피해 보려고도 했지만, 다른 직원이 눈치를 줘 그럴 수 없었다고 했다.

"은행을 다니는 내내 업무 시간이 부족했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제가 설거지를 비롯해 직원들이 먹는 점심이나 간식 준비랑 뒷처리를 하려고 회사에 온 건 아니니까요..."

사라지지 않는 '직장 갑질'

최근 지방 소재 중소 은행 근무자들의 '갑질 폭로'가 이어지면서 정부가 특별감독에 나섰다.

27일 고용노동부는 전북 남원 동남원 새마을금고와 대전 유성구 구즉신협을 특별근로감독 한 결과 '직장 내 괴롭힘과 성희롱, 성차별 등 다수의 노동관계법 위반 행위'가 있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앞서 동남원 새마을금고 갑질 폭로 제보자는 언론을 통해 "여직원들이 점심시간에 맞춰 쌀을 씻어 밥솥에 안치고, 밥이 질거나 뻑뻑하면 꾸중을 들었다"며 "사무실 화장실에 있는 수건을 직접 집에 가져가 세탁하고 건조해 가져와야 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일을 거부할 경우 폭언 등의 응징이 있었고, 이외에도 회식 강요와 성희롱 등의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고용노동부는 감독 결과 밥 짓기와 빨래, 회식 강요, 폭언, 성차별 등의 폭로 내용을 확인했다.

심지어 '상사가 부르면 즉시 일어서자', '상사는 섬겨야 한다', '상사의 단점을 너그러이 받아들이자' 등 직장 상사에 대한 지침이 존재했으며 이를 강요한 것으로 밝혀졌다.

구즉신협 감독 결과도 이와 비슷했다. 출퇴근 시 픽업, 자녀 등·하원, 담배 등 개인적인 용무 지시도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이번 특별감독은 사회 초년생인 청년(MZ) 세대들이 불합리하고 잘못된 조직문화로 인해 노동권이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 사례"라며 "정부는 직장 내 괴롭힘 등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업장은 예외 없이 특별감독을 실시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청년층을 비롯한 취약계층의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직장랍질119 근로기준법 개정 퍼포먼스

사진 출처, News1

사진 설명, 지난 5월 서울 중구 파이낸스빌딩에서 직장갑질119 회원들이 근로기준법 개정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지방은 '갑질 사각지대'?

특히 지방 소재 기업의 경우 지역적 폐쇄성으로 인해 근무자들이 갑질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민간 공익단체 직장갑질119의 오진호 집행위원장은 BBC 코리아에 지역 중소기업 근무자들의 갑질 제보가 꾸준하다며 "공통점은 이사장이나 대표가 지역 유지인 경우가 많고 제왕적 권력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직원들은 갑질을 당했어도 취업 불이익 등 보복이 두려워 신고하거나 맞서 싸우는 걸 어려워한다"고 덧붙였다.

김성희 산업노동정책연구소장은 "지방의 경우 지역 울타리가 넓지 않고 개인의 권리보다 전체의 이익이 우선시되는 경향이 있다"이라며 "지역적 유대라면 유대고, 담합이라면 담합인 구조에서 문제를 제기하기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신원 보호'와 '확실한 조치' 확신 줘야

오 위원장은 직장 갑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고자의 신원 보호와 신고에 따른 확실한 조치 두 가지가 보장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람들이 직장에서 갑질을 당하고도 신고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신고했을 때 불이익을 입지 않을까'와 '신고한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될까'라는 고민 때문이에요."

오 위원장은 이를 위해 회사가 자체적으로 또는 정부부처와 공동으로 직원을 상대로 정기 익명 조사를 진행해 필요하다면 징계나 처분 조치하는 등 관련 절차를 확립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번에 고용노동부에서 동남원 새마을금고 직원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병행한 결과 직원 중 54%가 직장 내 괴롭힘 등 불합리한 조직문화를 경험한 적 있다고 밝혔다. 특히 여직원의 경우 100%가 한 달에 한 번 이상 이러한 일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김 소장은 "갑질에 대한 가이드라인이나 규정, 법률이 만들어졌지만 이와 관련한 사회적 인식은 아직 높지 않은 편"이라며 "'갑질'에 대한 판단 기준이 쌓여 사회적 규범으로 정착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