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루블화로 결제 않으면 천연가스 공급 중단' 협박

독일의 천연 가스 공급시설

사진 출처, Getty Images

    • 기자, 마이클 레이스
    • 기자, BBC 비즈니스 전문기자

러시아가 31일(현지시간) 이른바 '비 우호 국가'의 경우 러시아 통화인 루블화로 대금을 결제하지 않으면 천연가스 공급을 중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4월 1일부터 "러시아산 가스 구매 시, 러시아 은행에 루블화 계좌를 개설해야 한다"라는 내용의 대통령령에 서명했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에 무료로 상품을 파는 국가는 없다. 러시아도 자선 단체가 아니긴 마찬가지이다. 즉, (루블화로 지급하지 않으면) 천연가스 기존 계약은 중단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서방의 대러 제재로 타격을 입은 루블화 가치를 끌어올리려는 시도로 분석된다.

이번 조치에 따라 러시아산 천연가스 구매자들은 러시아 국영 가스 기업 가스프롬의 금융 자회사인 가스프롬방크에 계좌를 개설해 이곳으로 유로나 달러로 결제 대금을 송금해야 한다.

그 뒤 가스프롬방크가 받은 자금을 루블화로 환전해 가스 대금 결제가 루블화로 이뤄지게 한다.

영국 옥스퍼드 에너지연구소의 잭 샤플스 박사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1일부터 바로 적용되는 법령이지만 유럽의 구매자들이 적어도 5월 중순까지는 가스 대금을 루블화로 결제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면서 천연가스 공급이 즉각적으로 끊길 일은 가능성이 작다고 시사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번에 새롭게 도입한 결제 조건은 러시아의 주권을 강화하기 위함이며, 서방 국가가 이를 따른다면 러시아 또한 계약 의무를 성실히 이행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독일은 푸틴 대통령의 이번 발표가 "협박"이나 마찬가지라고 비난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서방 국가는 대러 경제 및 무역 제재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유럽연합(EU)은 회원국들의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도가 높아 미국과 캐나다와 달리 러시아산 석유나 천연가스 사용을 금지하지 않은 상태다.

EU는 천연가스의 약 40%, 석유의 30%를 러시아로부터 공급받고 있어, 러시아산 에너지 공급에 차질이 생기면 대체하기 쉽지 않다.

한편 러시아 또한 하루 4억유로(약 5300억) 어치의 천연가스를 EU에 판매하는 상황에서 다른 시장을 찾을 마땅한 방법이 없긴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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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lysis box by Faisal Islam, economics editor

분석: 파이살 이슬람, BBC 경제 에디터

러시아 크렘린궁은 우크라이나 침공을 둘러싼 서방과 러시아 간의 경제 싸움이 극적으로 확대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푸틴 대통령은 서방국가가 루블화로 결제하지 않으면 유럽으로 천연가스를 수출하지 않겠다며 으름장을 놨다.

그러나 시장 반응을 살펴보면 유럽 구매자들이 외환 거래 기관을 가스프롬방크로 바꾸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여러 러시아 은행들이 제재 대상에 추가됐지만, EU 회원국이 러시아산 가스와 석유 구매 비용을 지급할 수 있도록 가스프롬방크는 제재 대상에서 포함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천연가스 가격이 여전히 매우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번 발표로 특별히 더 치솟지 않았다. 이번 발표와 관련해서 대안이 없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 분석가는 이번 결정이 러시아 내에서 푸틴 대통령의 강한 이미지를 유지해주기 때문에 그의 "체면을 세워줬다"라고 평가했다.

사실 러시아 관료들이 수십 년간 거듭 말했듯, 냉전 시기 관계가 최악일 때도 서방 국가는 러시아산 에너지를 중단없이 계속 수입했다.

그리고 러시아도 결국 천연가스 대금이 필요하고, 우크라이나와의 평화 협정이 체결된 후에도 EU라는 거대 시장을 계속 유지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천연가스 공급이 중단될 위험이 커지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 따라 EU 회원국들은 수요를 관리하기 위한 여러 비상 대책을 마련해왔다. 그리고 에너지 수요를 고려할 때 만약 정말 공급이 중단된다면 EU에는 겨울 보다는 봄이나 여름에 끊기는 게 더 낫다.

이번 발표로 가스프롬방크로 지불되는 자금을 동결할 수 있는 서방세계의 능력을 제한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는 푸틴 대통령이 "천연가스를 무료로 가져가는 일"이라고 묘사한 상황이기도 하며, 이전에 우크라이나 관료들이 제안한 방안이기도 하다.

석유와 천연가스를 팔아 벌어들이는 달러와 유로는 강력한 대러 제재에 맞서는 러시아 경제의 생명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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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갈등 악화'일 수도

러시아가 "이번 결정을 강제적으로 이행하기 위해" EU 회원국에 천연가스 판매를 중단한다면 "냉전이 한창일 때조차 본 적 없던 심각한 갈등 악화"일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영국 글로벌시장조사기업 피치솔루션은 "그렇게 된다면 러시아의 경제적 피해도 막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러시아가 새로 발표한 법령에 따라 과연 천연가스의 유로화 지불을 전면 금지할지도 아직 불분명한 상태다.

한편 서방 기업과 정부는 루블화로 대금을 결제하라는 러시아의 요구는 유로화 또는 달러로 설정된 기존 계약의 위반이라며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독일 기업은 기존 계약에 명시된 대로 러시아산 천연가스 요금을 유로화로 계속 지불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자산운용사인 인베스텍의 네이선 파이퍼 석유 및 천연가스 연구 소장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푸틴 대통령의 이번 조치는 "유럽이 가하고 있는 경제적인 압박을 되돌려주기 위한" 시도로 해석되며, 외환시장에서 루블화 수요가 상승하면 루블화 가치가 상승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러시아는 장기적인 측면에서 '안정적인 천연가스 공급자'라는 지위를 계속 유지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실제로 가스 공급을 중단할지는 아직 불분명"이라고 덧붙였다.

"그렇긴 하지만 영국과 EU 내 천연가스 가격이 지난 10년 치 평균에 거의 6배 가까운, 사상 최고가를 유지 중입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소비자가 부담해야 할 에너지 비용이 급상승할 것입니다."

노르트스트림1 가스관은 불과 10여 년 전 개통돼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다

사진 출처, AFP

사진 설명, 노르트스트림1 가스관은 불과 10여 년 전 개통돼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다

샤플스 박사는 서방 국가와 러시아 모두 "적응해" 차질 없이 에너지 무역을 지속할 수도 있고, 한쪽 또는 양쪽 모두 계약 위반을 주장하며 상황이 고조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어느 한쪽 또는 양쪽이 중재를 요구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할지라도 천연가스 공급에 차질이 없길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천연가스 공급 중단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비상 계획 돌입

한편 천연가스의 절반과 석유의 3분의 1을 러시아에 의존하는 독일은 자국민과 기업에 천연가스 부족 사태를 대비해 소비를 줄이라고 촉구했다.

천연가스의 약 40%를 러시아로부터 수입하는 오스트리아는 시장을 더 예의주시하는 모습이다.

기존 천연가스 비상 계획에 따라 독일과 오스트리아 모두 "조기 경보 단계"에 들어섰다. 이는 국가가 잠재적인 천연가스 공급 부족에 대비하기 위해 마련한 총 3단계 중 첫 번째 단계다. 마지막 3단계에서는 정부가 천연가스 배급제를 도입할 수 있다.

천연가스의 90%를 러시아 가스프롬으로부터 들여오는 불가리아는 자국 천연가스 저장 능력을 거의 두 배로 늘리면서도 공급 차질에 대비하기 위해 지하 시추 공사를 입찰에 부쳤다.

한편 영국의 러시아산 천연가스 의존도는 5% 미만으로, 공급에 차질이 있다고 해서 직접적인 영향은 없겠지만, 유럽 내 수요 증가로 글로벌 시장에서 천연가스 가격이 상승하면 영국 또한 이로 인한 영향에서 자유롭진 못할 것이다.

영국 정부는 러시아산 천연가스 대금을 루블화로 지불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