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폴트: 러시아, 100여 년 만에 '외화표시 국채 채무불이행'

벤 킹, 디어베일 조던 / BBC 비즈니스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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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Getty Images

러시아가 100여 년 만에 외화표시 국채에 대한 이자를 지급하지 못해 디폴트(채무불이행)에 빠진 것으로 27일(현지시간) 알려졌다.

전날인 26일 기한이 도달하는 외화표시 채권 이자 1억달러(약 1300억원)가 납입되지 않은 것이다.

러시아는 해당 채권 이자를 갚을 수 있는 자금도, 의지도 있지만 국제사회가 러시아의 외채 이자 지급 통로를 막으면서 국제 채권자들은 돈을 받지 못하고 있다.

앞서 러시아 정부는 국가 위신에 큰 타격인 디폴트 선언을 막기 위해 노력해왔다.

현 상황에 대해 안톤 실루아노프 러시아 재무장관은 "웃기는 일"이라면서 단기적인 영향은 없을 것이라 밝혔다.

이에 대해 러시아 최대 은행인 '스베르방크 CIB'의 전 수석전략가이자 현재 러시아 컨설팅 기업 '매크로 어드바이저리'의 설립자인 크리스 위퍼 CEO는 석유 등 고가의 상품 수출에서 오는 수입원이 있기에 러시아가 외채를 모집할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위퍼 CEO는 앞으로 우크라이나 상황과 그에 따른 제재가 개선된 이후 "과거 문제의 유산"으로 남아 다시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때 가서 경제에 영향을 미치고 회복을 훨씬 더디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해당 이자의 원래 지급일은 지난달 27일까지였으나, 30일간 유예 기간이 적용된 상태였다.

러시아 정부는 자신들은 이미 국제 예탁 결제 회사인 유로클리어에 이자 대금을 보내 상환 의무를 완료했다고 밝혔다. 원래대로라면 유로클리어가 받은 이자를 채권 투자자에게 지급하게 된다.

그러나 블룸버그 통신은 여전히 대금이 유로클리어에 묶여있으며, 투자자들은 돈을 받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한편 로이터 통신은 소식통 2명의 말을 인용해 유로화로 표시된 러시아 채권을 보유한 일부 대만인 투자자가 이자를 받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30일 유예기간이 끝나는 26일 저녁 러시아 채권은 '디폴트'로 간주된다.

유로클리어 측은 지불이 차단 됐는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도입된 모든 대러 제재 사항을 준수하고 있다고 답했다.

한편 러시아의 국영 통신사인 RIA 노보스티 통신은 실루아노프 장관이 국제 투자자들이 "대금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인정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도 실루아노프 장관은 러시아는 지불 의사가 있고, 이자를 갚을 자금도 있기에, 보통 정부가 지불을 거부하거나 지불 능력이 없는 상황을 의미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디폴트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현재 상황이 절대 디폴트가 아님을 모두가 압니다. 이 모든 상황이 웃기는 일입니다."

한편 디폴트를 선언한 국가는 일반적으로 외채를 모집하기 어렵지만, 이미 러시아는 대러 제재로 인해 서방 시장에서의 자금 융통이 막힌 상태였다.

또한 러시아는 화석 연료 수출로 매일 약 10억달러를 벌어들이고 있으며, 지난 4월에는 실루아노프 장관이 러시아는 추가 자금 융통 계획이 없다고도 밝혔다.

상환 압박 촉진

한편 위퍼 CEO는 이번 디폴트 사건이 다른 러시아 국채에 대한 상환 압박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정부가 발행한 국채 중 400억달러어치가 달러 또는 유로화 표시 채권이며, 이중 절반이 국제 투자자 소유다.

위퍼 CEO는 BBC '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모든 채무 상품은 조기 상환 조항이 있기에 러시아 부채 일부는 이제 자동으로 만기 된다"며 "어떤 부채에 대해 디폴트 선언을 하면 즉각적으로 다른 부채에 대한 상환 요구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러시아는 200억달러에 달하는 즉각적인 부채 상황 압박에 직면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 상황에 대해 안톤 실루아노프 러시아 재무장관은 "웃기는 일"이라면서 반발했다

사진 출처, Reuters

사진 설명, 현 상황에 대해 안톤 실루아노프 러시아 재무장관은 "웃기는 일"이라면서 반발했다

러시아가 마지막으로 외채에 대해 디폴트를 선언했던 것은 1918년 볼셰비키 혁명 때였다. 당시 공산주의 국가를 세운 블라디미르 레닌은 과거 러시아 제정이 진 빚을 갚지 않으려 했다.

러시아는 1998년에도 디폴트를 선언한 적이 있는데, 다만 이때는 외채가 아닌 러시아 루블화 표시 국채가 그 대상이었다.

당시 보리스 옐친 러시아 전 러시아 대통령의 시대가 막바지에 접어드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러시아는 금융 위기를 맞았다. 이에 러시아 정부는 국내 부채에 대해 디폴트를, 외채에 대해선 상환 유예를 선언했다.

한편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대가로 미국과 유럽연합(EU)이 반러 제재를 가하면서 러시아의 디폴트 선언은 불가피해 보이는 실정이었다.

대러 제제에 따라 국제 금융결제망인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서 퇴출되면서 전 세계 투자자들에게 대금을 지급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러시아 측은 디폴트 사태는 없다면서 이번 사태 전까지는 제때 지급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지난달 미국 재무부가 당월 25일로 만기 되는 러시아 외화 표시 국채의 이자 지급에 대한 제재 예외 조치를 갱신하지 않으면서 이번 러시아의 디폴트 사태는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졌다.

러시아 정부 또한 이제 이를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23일 향후 달러나 다른 국제 통화로 표시된 채권을 포함한 모든 국채에 대해 자국 외채 결제 기관인 국가예탁결제원(NSD)을 거쳐 루블화 형태로 상환하겠다는 법령을 발표한 것이다.

한편, 모스크바에 사는 위퍼 CEO는 대러 제재와 서방 기업들의 러시아 철수에도 불구하고 삶에는 큰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솔직히 모스크바에 살고 있어도 신문을 읽지 않았다면 물가가 오른 것을 빼고는 2월 24일(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일) 이전과 별로 다른 게 없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러면서 위퍼 CEO는 "지난 3, 4월에는 공장을 가동할 부품이나 자재를 구할 수 없게 되면서 물품 부족 사태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컸다. 이에 따라 이번 여름 [혹은] 초가을까지 심각한 고용 감소나 실업률 증가가 있을 수 있다고 예상했다"면서 "상황이 호전됐다"고 덧붙였다.

"카자흐스탄과 터키 등을 경유하는 대체 수입 루트가 마련됐습니다. 또한 러시아 정부가 소위 '병행 수입 계획'을 추진하면서 3, 4월에 수입되지 못했던 많은 제품들이 더 비싸지긴 했어도 들어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