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투표용지에 '그림'을 넣어달라는 사람들, 이유는?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등 장애인 관련 단체 회원들이 지난달 18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서문 앞 삼거리에서 발달장애인의 공직선거 정보 접근권 보장을 위한 차별 구제 청구 소송을 제기하기에 앞서 관련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사진 출처, 뉴스1

사진 설명,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등 장애인 관련 단체 회원들이 지난달 18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서문 앞 삼거리에서 발달장애인의 공직선거 정보 접근권 보장을 위한 차별 구제 청구 소송을 제기하기에 앞서 관련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 기자, 김효정
    • 기자, BBC 코리아

선거 기간만 되면 '누구에게 투표할까'보다 '어떻게 투표해야 할까'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에겐 당연한 투표가 쉽지 않은 사람들, 바로 발달장애인들의 이야기다.

'숫자와 글씨만 있는' 투표용지는 글을 잘 모르는 발달장애인에게 장벽 같다. 어려운 단어가 많은 선거 안내물이나 공보물은 암호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들은 시각장애인과 신체장애인과는 달리 보조인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

오는 3월 9일 20대 대선을 앞두고 '투표 장벽을 낮춰달라'고 외치는 발달장애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너무나 어려운 투표'

"저는 글씨를 못 읽잖아요. 투표를 제대로 못했어요."

지적장애와 뇌병변으로 한쪽 팔다리 거동이 어렵고, 글을 잘 읽지 못하는 임종운 씨(54)는 2020년 4월 열린 21대 총선 투표에서 크게 당황했다.

그는 유권자로서 한 표를 당당하게 행사하고 싶었고, 마음속으로 뽑고 싶은 후보도 정했다.

그러나 막상 기표소에 가서는 한참을 머뭇거렸다. 글자와 숫자만 빼곡히 적힌 투표용지를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임 씨는 결국 아무 곳에나 도장을 찍고 나왔다.

선관위 지침에는 장애로 기표가 어려우면 가족이나 보조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

임 씨도 예전에는 보조인의 도움을 받아 투표하곤 했다.

그런데 원래 적혀있던 '지적·자폐성 장애 포함'이라는 표현이 2020년부터는 대리투표를 우려해 빠지게 됐다.

규정이 바뀌었지만, 발달장애인들에게 전달된 내용은 없었다. 임 씨는 이날 보조인과 함께 입장했지만 제지당하기도 했다.

"한 글자 이상은 읽는 데 어려움이 있어요. 휠체어 타고 있는 사람은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발달장애인은 투표가 너무 어렵게 됐어요."

발달장애인 박경인(28)씨 역시 투표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다.

그는 글을 읽을 수 있으나, 어려운 단어나 문맥 파악은 쉽지가 않다. 이 때문에 공약이 적힌 선거공보물을 볼 때마다 난감해진다.

함축적인 한자어와 개념어 등이 사용되거나 긴 문장으로 서술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공보물에 나온 정책 내용의 의미가 무엇인지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파악하기가 어렵다.

박 씨는 "글씨가 많고 용어들이 어려웠다"며 "장애아동, 노동, 노인 정책에 관심이 많은데, 공보물에 그 내용이 쉽고 자세하게 나오면 좋겠다"고 밝혔다.

국가 상대 소송

발달장애인들은 앞서 국가인권위원회 진정을 내기도 했다. 투표 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대상에 발달장애인만 제외한 선관위의 지침은 소수자의 참정권 행사를 막은 명백한 차별이라는 것.

인권위는 1년간의 고심 끝에 '발달장애인을 제외한 선관위 지침은 차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까지 선관위는 별다른 대안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이에 지난달 18일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와 한국피플퍼스트 등의 단체 등 장애인단체들은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차별구제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요구는 발달장애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선거공보물'과 '그림 투표용지'를 제공해달라는 것이다.

임 씨와 박 씨도 소송에 함께 했다.

박 씨는 소송에 참여한 이유에 대해 "우리가 계속 쉬운 공보물을 내달라고 이야기했는데 그것도 들어주지도 않고, 쉬운 투표용지 제작을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들어주지 않아서 소송하게 됐다"고 말했다.

임 씨는 "투표 종이를 봐도 모르다 보니, 아무나 막 찍게 되니까 거기다 사진을 찍어서 넣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하게 됐다"고 했다.

이번 대선은 바뀌나?

아직 소송 중이지만, 발달장애인들의 요구가 이번 대선 전에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먼저 그림 투표용지 등이 도입되려면 공직선거법 개정이 필요하다.

더불어민주당 최혜영 의원은 앞서 지난해 10월 관련 내용을 담은 공직선거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발의했다.

개정안에는 투표용지에 소속 정당을 상징하는 로고와 후보자 사진을 함께 포함하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하지만 입법조사처는 '이미지 선거'가 될 수 있다는 등의 이유로 그림 투표용지 도입에 우려를 표했고, 아직 법안 소위도 통과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이번 대선 투표용지 인쇄일인 28일 전까지 시행되기에는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다.

하지만 소송에 참여한 발달 장애인들은 계속해서 목소리를 낼 계획이다.

박경인 씨는 "우리나라가 잘 되기 위해 선거를 하는 것이고, 후보자들에 대해 정보를 충분히 알아야 잘 찍을 수 있다"라며 "발달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해줄 환경이 꼭 만들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사진이 들어간 투표용지와 쉬운 공약집

그렇다면 해외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실제 스코틀랜드, 대만, 아일랜드, 이집트,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의 50여개 국가에서는 투표용지에 후보자들의 사진을 인쇄해 유권자들이 후보자들을 쉽게 알아보도록 하고 있다.

2016년 대만 총통 선거 투표용지

사진 출처, Getty Images

사진 설명, 2016년 대만 총통 선거 투표용지

공약집을 쉽게 내는 곳도 있는데, 예를 들어 스웨덴의 모든 정당은 정책, 공약 등을 발달장애인도 이해하기 쉽게 자료를 구성하고 있다.

영국도 2010년 총선 이후 노동당 등 주요 정당은 학습·발달장애를 지닌 유권자 등을 위해 '읽기 쉬운 요약집(Easy Read Summary)'을 발간하고 있다.

영국 노동당의 '읽기 쉬운 정책 요약집' (Easy Read Summary). 그림과 함께 쉽게 설명이 돼 있다

사진 출처, 영국 노동당 홈페이지

사진 설명, 영국 노동당의 '읽기 쉬운 정책 요약집' (Easy Read Summary). 그림과 함께 쉽게 설명이 돼 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발달장애인의 투표권 보장 외에도 여러 선거와 행정 정보에 대한 접근성이 낮아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동석 대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BBC 코리아에 "쉬운 글 버전의 선거공보 제공, 쉬운 글 버전의 투표용지가 필요하다"며 "발달장애인과 관련된 행정문서들이 모두 쉽게 제공돼야 한다"고 했다.

이 교수는 "일본만 하더라도 후생성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발달장애 관련 문서는 쉬운 글 버전으로 만들고 있고,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도 시행하고 있는데, 선거 관련 정보는 당연히 포함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