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버마인드 30주년: '너바나'의 앨범은 세상을 어떻게 뒤흔들었는가?

록그룹 너바나

사진 출처, Niels van Iperen/Getty Images

    • 기자, 아와 하이더
    • 기자, BBC Culture

올해는 너바나의 앨범 '네버마인드' 발매 30주년이다. 이 앨범이 브라질과 폴란드, 일본 등지의 팬과 음악가에게 준 영향을 정리했다.

시애틀 출신 3인조 록밴드 너바나의 앨범 '네버마인드'가 발매 30주년을 맞았다. 여전히 팬들의 마음에 잔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앨범이다. 이 곡의 오프닝을 들으면, 어느새 런던 교외에서 열리는 십대들의 파티로 돌아간다. 어두컴컴한 술집, 기타의 선율과 기계음이 나의 영혼을 위해 분투하는 듯한 그곳으로.

네버마인드의 사운드를 처음 들었을 당시, 나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음악을 몹시 사랑하는 어린 무슬림 여성이자 이라크계 영국인이었던 내게 이 음반에 대한 언론 보도나 시애틀에서 싹트고 있는 '그런지' 록은 꽤나 생소했다. 당시의 주류 음악계는 남성적이고 백인 중심적이며 배타적이었다.

너바나의 음악은 그러한 흐름의 대척점에 서 있었다. 문화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고 남성적이면서 동시에 여성적인 리더, 커트 코베인이 특히 그랬다. 네버마인드 30주년을 맞아, 나는 이 앨범이 전 세계 팬들과 음악가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봤다. (현대 기술에 힘입은) 다양한 글로벌 문화 교류는 네버마인드의 위상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모든 위대한 대중 문화물이 그러하듯, 네버마인드는 시공간을 뛰어넘는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내가 네버마인드를 처음 접한 것은 90년대 초 런던에서였다. 현재 NYC에서 미디어 전략가이자 인권 운동가인, 그리고 '더 메이크 에이전시'를 운영중인 마하디스 케샤바르즈는 당시 시애틀에 사는 15살의 이란계 미국인이었다. 그는 시애틀 인근 레드몬드에 있는 '올드 파이어 하우스'의 인디 밴드 공연을 예약하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이미 너바나를 알고 있었다. 얼마전 학교에서 친구가 자신의 사촌(커트 코베인)이 만든 노래라며 카세트 테이프 하나를 선물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검은색 카세트 테이프에 수정액으로 '블리치(너바나의 첫 앨범)'라고 쓰여 있었다"며 "들어보니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으면서도 정말 멋졌다"며 웃었다.

케샤바르즈에 따르면, 당시 올드 파이어 하우스는 변화무쌍한 곳이었다. "젊은 사람들이 그 공간에서 원하는 것을 했기 때문에, 정치적 공간이자 음악 공간, 집합의 공간이 되었죠."

그곳은 '다이노서 주니어', '비키니 킬', '크리스 코넬', 코베인 같은 음악가들이 자주 드나들던 곳이기도 했다. 그는 "우리에게 펑크 록은 당연한 음악이었다"며 "특별한 무언가이기도 했고, 철학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음악을 통해서) 급진 페미니스트가 되고, 남성들이 우세한 시대에 우리를 위한 공간을 만들고, 남성들에게 페미니스트와 동맹이 되는 법을 가르쳐줬습니다. 커트는 그들 중 한 명이었죠. 유색인종이자 무슬림 여성이라는 정체성으로 인해 저는 소외감을 많이 느끼기도 했지만, 그로 인해 저만의 공간을 찾게 됐어요. 하지만 학교에서는 그런 공간이 없었어요. 대신 펑크 록에서 큰 위안을 얻었죠."

케샤바르즈는 시애틀에서 코베인을 만났고, 그에게서 '부드러운 영혼'을 발견했다

사진 출처, Jeff Kravitz/FilmMagic

사진 설명, 케샤바르즈는 시애틀에서 코베인을 만났고, 그에게서 '부드러운 영혼'을 발견했다

너바나의 네버마인드는 시애틀 인디 서브팝이 막 싹을 틔우던 1991년 9월, 메이저 레이블 '게펜'을 통해 발매됐다. 발매 이후 유럽 순회공연을 통해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고, 주류 시스템에 충격을 가했다.

에드 로센블렛 게펜 레코드 대표는 그 일은 "우리가 '덕 레코드사'를 넘어서는 계기 중 하나"라고 묘사했다. 하지만 시애틀의 펑크 록 현장 분위기는 달랐다. 케샤바르즈는 "나는 네버마인드를 배신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고 했다.

"너바나는 공동체를 대표하고 많은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끼고 있었어요. 그런데 돌이켜 보면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음악을 합법적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에, 어느 정도는 그 밴드의 시도에 공감하기도 했죠. 네버마인드가 나온 직후 이란에 간 적이 있어요.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몰래 가져간 테이프를 들려줬죠. 다들 이런 표정이었어요. '이거 뭐야? 멋진데? 나도 복사 좀 해줄 수 있어?'"

"하지만 당시 시애틀 사람들은 몹시 흥분했어요. 당시 펑크 록의 윤리는 메이저 레이블을 통해서는 해방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우리는 우리가 음악을 즐기던 공간의 임대료와 입장권 가격이 오를 것이라는 걸 알았죠. 그래서 우리의 공간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어요. 커트도 종종 올드 파이어 하우스 한 구석에서 조용히 음악을 듣곤 했어요. 그는 온화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고, 모두가 그를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연주하는 사람에 따라 불같은 화를 쏟아내서, 환영받지 못할 때도 있었어요. 마음이 엄청 아팠을 겁니다."

전 세계적 반향

네버마인드는 전 세계에서 30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음악 역사상 가장 큰 성취를 얻은 앨범 중 하나다. 또한 ('스멜스 라이크 틴 스피릿' 같은 곡의 영상을 계속 틀어대는) MTV에 힘입어 전 세계 청년 문화 형성에도 기여했다. 현재 포르투 알레그레에 있는 루터 대학의 교수인 브라질 문화학자 모이스 네토는 11살 때 네버마인드를 처음 접하며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완벽했었다"며 "소음과 팝 음악을 밝게 합성한 것처럼 들렸다"고 말했다.

네토는 브라질의 군사 독재(1964-1985)가 오스 무탄치스(코베인이 가장 좋아하는 밴드 중 하나)를 포함한 많은 저항적 음악인들을 자극했다고 말했다. 브라질 독재 정권의 종말은 록과 펑크, 포스트 펑크 등으로 음악의 지평을 넓혔다. 하지만 그에 따르면, 네버마인드 이전에는 브라질과 세계 음악계의 흐름 사이에는 '시차'가 있었다. 네토는 "브라질에는 펑크가 있었지만, 영국과 미국에서 전성기를 맞은지 거의 10년이 지난 것들이었다"며 "그리고 80년대 대중문화와 주류 아레나 밴드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너바나와 MTV의 영향력은 이 시차를 없애버렸어요. 저를 포함한 젊은이들이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스타일의 옷을 입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문화적 동질성이죠. 그런지 록은 삽시간에 대세로 자리잡았고, 한 때 '멋지다'고 평가받던 것들이 한 순간에 추하며 과장된 것이 되어버렸어요. 커트는 관습에 대한 도전을 상징했습니다."

91년 당시 포르토 알레그레에서 살던 로제리오 마이아 가르시아는 네버마인드 음반에 있는 "수영하는 아기" 사진에 흥미를 느꼈다고 했다. (이 앨범은 음악적 영향력뿐만 아니라, 앨범에 아이코노그래피를 넣는 문화를 촉발시켰다.) 가르시아는 "당시 우리는 모두 록과 메탈을 듣고 있었지만, 네버마인드의 사운드는 전혀 달랐다"며 "집에서 노는 '아이들' 처럼 날 것의 소리였고 정말 시끄러웠다"고 했다.

"그 앨범으로 인해 그런지 록에 대한 우리의 귀가 트였어요. 네버마인드 이후, '사운드가든', '앨리스 인 체인스', '펄 잼' 같은 밴드들이 브라질에서 알려졌고, 많은 아이들이 연주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90년대 초 포르토 알레그레는 라이브 음악이 댄스 음악에 밀려나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매일 밤 밴드의 공연이 열리기 시작했어요."

그는 '티타스'와 같은 브라질의 기성 밴드들도 시애틀의 프로듀서 잭 엔디누와 함께 앨범 '타이타노마키아(1993)'를 내면서 이러한 분위기에 일조했다고 덧붙였다.

가르시아는 이후 변호사가 됐지만, 여전히 너바나의 열렬한 팬으로 남아있다. 그는 "내 마음 속에서 네버마인드의 유산은 커트 코베인의 말련(코베인은 27세이던 1994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과 분리될 수 없다"고 말했다.

"나중에 깨닫게 됐어요. 그의 목소리가 삶에 대한 서글픈 폭력과 공허함을 표현했다는 것을. '리튬'과 같은 노래들은 새로운 관점을 보여줬죠. 저는 네버마인드가 우리 세대뿐 아니라 현재의 브라질 10대들이 겪는 감정과 두려움을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젊은 음학도였던 키아토스키(인디 록 밴드 '트루파'의 보컬이자 기타리스트)도 네버마인드에 매료됐다. 그는 "1991년 폴란드는 몇 년 전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되고 민주주의가 막 시작되던 시기였다"며 "냉소적인 자본주의 뿐만 아니라 너바나나 네버마인드 같은 아주 수준높은 문화도 유입되고 있었다"고 말했다. "폴란드의 10대에 MTV는 우리가 전 세계 청소년들과 다르지 않다는 신호였습니다."

폴란드 음악가인 그제고르츠 키아토스키에게 네버마인드는 공산주의 몰락 이후의 자유를 상징한다

사진 출처, Renata Dabrowska

사진 설명, 폴란드 음악가인 그제고르츠 키아토스키에게 네버마인드는 공산주의 몰락 이후의 자유를 상징한다

키아토스키는 슈베르트부터 비틀즈까지 모든 것을 들으며 자랐다. 그런 그에게 네버마인드는 자연스러운 진보였다. "매우 아름답고, 매우 단순한 노래였습니다. 킬러 사운드와 훌륭한 싱어송라이터의 완벽한 조합이었죠."

키아토스키의 밴드는 2019년에 시애틀 인스티튜션 서브 팝과 계약을 맺기도 했다. 그리고 밴드 초창기의 영감을 잊지 않고, 여전히 독창적인 음악을 계속하고 있다. "제 생각에 너바나와 네버마인드는 여전히 자유와 정상성을 상징합니다. 비현실적인 스타덤이 아니라, '보통의' 것이며 동시에 훌륭한 것이죠."

네버마인드는 수많은 국제적인 커버도 만들어냈다. 자메이카의 레게 아티스트 리틀 로이는 레게 스타일의 너바나 커버(배틀 포 시애틀, 2011) 앨범을 발매했고, 브라질의 카에타노 벨로소는 '컴 애즈 유 아'를 리메이크했다. 인도의 하드 록커 펜타그램은 라이브 연주 목록에 너바나 커버를 추가했다.

일본의 음악 저널리스트 히로코 신타니 역시 1991년 새로운 물결에 빠져들었다. 그는 이미 너바나의 블리치 앨범을 알고 있었지만, 처음에는 네버마인드가 너바나의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신타니는 "나의 첫 반응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였다"고 말했다.

"저는 네버마인드가 문화적 랜드마크가 되고 그렇게 많은 복제판을 판매하게 됐다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았어요. 하지만 제가 감탄한 것은 음악적인 스타일을 넘나드는 타고난 팝 감수성과 커트 코베인의 불편함에 대한 아이러니였습니다. 그가 주류로부터의 소외된 것은 결국 수백만 명에게 공감을 받았죠. 그 감수성 덕분입니다."

"저는 라디오와 MTV에서 날 것 그대로이면서 동시에 취약한 한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의 스릴을 기억합니다. 커트는 '현자를 만난 적이 없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여자다(곡 'Territorial Pissings' 가사)'라고 노래했습니다. 그 자체가 경이로웠습니다."

신타니에 따르면, 일본에선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수많은 국내 록 밴드가 나왔다. 하지만 그 시대의 주류 아티스트들은 반드시 불안이나 사회적 저항에 의해 움직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일본은 '버블 경제'를 누렸고, 우리의 'X세대'는 비교적 풍요로운 시기에 성장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분명히 네버마인드의 유산은 지속됐고, 이것이 2000-2010년 동안 나온 밴드들에게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2012년에는 컴필레이션 앨범 '네버마인드 트리뷰트'가 발매되었는데, 이 앨범에는 새로운 세대의 일본 밴드들이 네버마인드에 수록된 곡들을 순차적으로 커버한 노래가 담겼다.

터키의 음악가 가예 수 아크욜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네버마인드를 처음 접했다

사진 출처, Aytekin Yalçı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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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마인드에 영향을 받은 다른 아티스트는 이스탄불에서 활동하는 싱어송라이터이자 비주얼 아티스트인 가예 수 아크욜이다. 그는 두려움 없는 정치적 표현으로 널리 칭송받고 있는데, 네버마인드가 영감을 주었다고 했다. 그가 초등학생이던 1995년, 어머니 차에서 오빠가 가져다 놓은 카세트 테이프를 발견했다.

아크욜은 "네버마인드를 처음 들었을 때 정말 획기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너바나에 대한 질문으로 오빠를 괴롭혔다고 했다. "아마도 제가 동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오빠는 그렇게 말한 것 같아요. '그는 명성, 돈, 사랑 등 모든 것을 가졌지만, 죽음을 선택했다'고. 앨범에 실린 사진을 보면서 혼란스럽고 착잡한 마음이었어요."

"이런 보물을 발견한 건 행운이었죠.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었어요. 저는 저항적이고 반항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어요. 내 감정을 표현할 방법을 찾고 있었는데, 네버마인드가 저를 사로잡았고 나에게 로큰롤의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아크욜에게 네버마인드는 '고향'과 같은 앨범이다. 디지털 음원으로 들을 수도 있지만, 그는 여전히 카세트 테이프를 고집한다. "이 테이프와 함께 했던 기억들은 여전히 살아있고, 그 안에서 저는 안락함을 느낍니다."

네버마인드는 "아웃사이더" 정신을 많은 이들이 경험하게 했다. 요하네스버그의 록커 BLK JKS의 공동 설립자인 음푸멜레로 맥타도 마찬가지다; 90년대 초 맥타는 밴드를 하기 위해 고등학교를 그만뒀고, 음악 가게에서 일하며 네버마인드를 처음 들었다고 한다.

맥타는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자란 흑인 소년인 내게 너바나는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흔한 것이 아니었다"며 "바로 원초적인 에너지, 정직함이었다"고 말했다.

"너바나의 '컴 애즈 유아'에 담긴 정신은 제게 큰 반향을 일으켰어요. 그들은 하고 싶은 것 또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메탈 록커에서부터 마이클 잭슨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돈보다 중요한 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이것이 커트의 정치입니다. 저의 밴드 BLK JKS도 사회에 적응하는 것보다 저항하는 것을 더 중시합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죠. 너바나와 같은 등불이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음푸멜레로 맥타는 너바나에서 동류의식을 발견했다

사진 출처, Kgomotso Neto

사진 설명, 음푸멜레로 맥타는 너바나에서 동류의식을 발견했다

2009년 너바나의 전 드러머이자, '푸 파이터스'의 리더, 데이브 그롤은 롤링 스톤지와의 인터뷰에서 BLK JKS의 데뷔 앨범 '애프터 로봇'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반 중 하나라고 말했다. 2014년 그롤은 푸 파이터스의 남아프리카공화국 투어의 오프닝으로 BLK JKS를 초대했다.

맥타는 무대 뒤에서 푸 파이터스를 보며 두번째 앨범을 구상하던 때를 회상했다. "너바나 이후 데이브 그롤의 활동에 대해 생각했어요. 공연장에서 그를 보다니. 그리고 네버마인드를 다시 들었죠. 등짝을 한 대 맞은 듯했어요. 어서 스튜디오로 돌아가서 음악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이었죠."

미국으로 돌아온 케샤바르즈(1995년 푸 파이터스의 첫 공연을 돕기도 했다)는 시애틀의 음악계는 너바나의 베이시스트였던 크리스 노보셀릭 덕분에 어느정도 보존될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그는 요즘도 7살 난 아들과 함께 네버마인드를 듣는다.

케샤바르즈는 "이 음악에는 젊은 시절의 좌절과 분노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정부와 권력에 대한 좌절이 더 크게 만연한 상황이라, 네버마인드가 전하는 메시지는 오늘날에 더 강력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 감정에 귀를 기울이면서, 음악으로 저항했던 너바나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