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잊었나'…의대 증원 갈등 장기화에 애타는 환자들

창 밖을 보고 앉은 환자들

사진 출처, Reuters

    • 기자, 구유나
    • 기자, BBC 코리아

정부의 의료개혁안 발표 후 정부와 의사 간 갈등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자 환자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난달 정부의 의대 증원안을 포함한 의료개혁 패키지에 반발하는 전공의들이 사직서를 제출하고 근무지를 이탈한 이후 수술 지연 사태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7일 정부가 의료 공백에 따른 비상진료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대규모 재정을 투입하겠다고 밝힌 가운데, 환자단체에서는 조속한 사태 해결을 통한 진료체계 정상화를 요구하고 있다.

환자도, 의사도 떠난 병원

이날 BBC 코리아가 서울대병원에서 만난 50대 김미정(가명) 씨는 어머니의 항암치료를 위해 병원을 방문했다. 어머니는 지방에서 상경해 석 달째 치료를 받고 있다.

김 씨는 현재 어머니가 입원 없이 항암치료를 받고 있기 때문에 치료 일정이 연기되거나 취소된 적은 없다면서도 사태 장기화에 따른 우려를 표했다.

“암 환자 보호자로서 걱정되죠. 지금은 아니더라도 사태가 더 장기화하면 어머니도 피해를 볼까 봐요.”

그러면서 김 씨는 “의사들이 집단행동을 할 때마다 환자가 볼모가 된다”면서 “이 문제를 이번에, 안되면 나중에라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전국 각지에서 치료받기 위해 상경한 환자들로 늘 북적이는 소위 ‘빅5’ 상급종합병원에 포함되는 서울대병원. 이곳에는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환자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대형병원 의사 중 30~40%를 차지하는 전공의 대부분이 빠져나갔지만, 전임의와 교수들이 진료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은 의료 인력의 피로도가 높아지고, 최근 계약 기간이 끝난 전임의 이탈이 이어지면서 의료 공백 우려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한 전임의는 “필수의료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남아있지만, 솔직히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지방에 거주하는 40대 이은미(가명) 씨는 1년 전 식도암 수술을 받은 후 추적 관찰을 위해 CT 및 내시경 검사가 예정돼 있었지만, 내시경 촬영이 무기한 취소됐다고 말했다.

“저는 내시경 검사가 취소된 것만으로도 굉장히 불편하고 불안한 상황인데, 진짜 더 위중하신 분들은 정말 걱정이 클 거로 생각해요. 이 사태가 하루빨리 해결되기만을 바랄 뿐이죠.”

전남 지역에 거주하는 60대 퇴직 교사 최정호(가명) 씨는 지난달 전립선암 수술을 사흘 앞두고 일정이 무기한 연기됐음을 통보받았다.

"일단 병원에서 나와보라고 해서 나갔더니, 전공 교수가 지금 전공의들이 다 나가버려서 (수술을) 못 하니까 우선 약을 먹고 기다리라는 거예요. 그런데 골든타임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암이라는 게. 그러니까 암 환자들은 하루하루 피 말리는 거죠."

최 씨는 병원에서 호르몬을 조절하는 약을 타왔지만 부작용이 걱정되고, 수술 시기를 놓칠까봐 걱정된다고 했다.

"(겉으로) 바로 나타나진 않겠지만 (의료 사태로 인해) 누군가는 골든타임을 놓쳐서 원래라면 쉽게 치료할 수 있는 것을 치료하지 못해 고통스럽게 살다가 생을 마감할 수도 있잖아요. 그걸 누가 책임집니까."

김성주 한국중증질환자연합회 겸 한국암환자권익협의회 대표는 BBC코리아에 "(응급 환자로 분류되지 않는) 많은 환자들이 수술이나 항암치료 등의 일정이 취소되거나 연기된 상황"이라면서 "환자들이 적극적으로 신고하고 있지 않아 실제 사례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보건복지부가 공유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6일 오후 6시까지 의사 집단행동 피해신고·지원센터에 접수된 누적 상담 수는 982건으로, 이 중 408건이 수술 및 입원 지연, 진료 취소·거절 등 피해 신고에 해당했다.

서울대병원 건물 앞을 지나는 의사

사진 출처, Getty Images

사진 설명, 한국환자단체연합회의 안기종 대표는 항암치료 사이클이 돌아오는 다음 주가 환자들에게 고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암 환자들은 당장 다음 주가 고비'

정부와 의사들의 강대강 대치가 길게는 몇 달간 이어질 수 있다는 예상이 나오는 가운데, 치료가 늦어지는 중증환자들과 그 가족들의 우려는 점점 커지고 있다.

국내 9개 환자단체가 모인 한국환자단체연합회의 안기종 대표는 다음 주가 중증환자, 특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암 환자들에게 있어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으로 봤다. 일반적으로 항암치료가 3주 간격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다음 주면 지난달 20일 전공의들이 집단으로 사직서를 제출하고 병원을 떠난 지 3주를 꽉 채우게 된다.

안 대표는 “3주째가 되면 재발이나 중증질환 악화로 사망하는 환자까지 나올 수 있는 절박한 상황”이라고 호소했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는 지난달 29일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6개 환자단체가 소속된 한국중증질환자연합회의 안선영 이사는 “항암 치료는 병의 진행을 막기 위한 것”이라며 “당장 죽는 게 문제가 아니라 과정, 그러니까 치료 시기를 놓치는 게 문제”라고 강조했다.

안 이사는 10여 년 전, 유방암 3기 말기 판정을 받고 2년간 치료를 받았다.

그는 “당장 사람이 죽어 나가야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며 중증환자들이 적절한 때 치료를 받지 못할 경우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고 지적했다.

암 환자와 환자의 가족들이 활동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수술이 연기됐다"며 사태 장기화에 따른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국회 국민동의청원 게시판에도 난소암 4기 환자의 딸이라고 밝힌 한 작성자는 입원 및 수술을 사흘 앞두고 무기한 연기 소식을 통보받았다며 “정부와 의사의 싸움에 왜 보호받아야 할 환자들이 가장 큰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 거냐”고 호소했다.

전공의 집단행동 중단과 공공의료 확대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는 의료노조

사진 출처, EPA-EFE/REX/Shutterstock

사진 설명, 지난달 27일 서울대병원에서 의료노조가 전공의 집단행동 중단과 공공의료 확대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증원 필요하지만, 근본적 해결책 아니야'

한국에서는 비교적 가벼운 병증으로 동네 의원을 찾을 때는 빠르고 편리하게 진료를 받을 수 있다.

중증질환자의 경우 상황이 다르다. 이들 대부분이 거주 지역과 상관없이 서울 소재 대형병원으로 몰리기 때문에 오랜 대기시간과 짧은 진료시간은 이들이 공통으로 겪는 문제다. 의사 증원에 딱히 반대할 이유는 없다는 뜻이다.

안 이사는 “의사들이 (사회적으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라면서도 “하지만 사회 제도 전체는 사회를 위해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정부가) 수요 예측에 실패할 수도 있죠. 하지만 다른 여러 직업군과 달리, 의사의 경우 미래에 공급이 (수요보다) 많으면 절대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까?”

안 대표는 이번 의료개혁 논의 과정에서 정부든 의료계든 환자를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환자들을 “볼모”나 “인질”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면 전공의들은 테러범이고 의협이나 전공의 협의회는 테러단체가 되는 거잖아요. 정부가 이들을 진압해서 우리 환자들, 인질들을 다 구해야 하는 거고요. 그런데 그런 상황이 아니거든요.”

김 대표는 "정부는 우리(환자)를 위한 정책이니 기다려달라는 얘기를 계속하지만, 우리는 지금 당장 아프고 위급한 사람들"이라며 "재정을 투입해 지금 상황을 버티듯 이어갈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임시로 의사를 고용하는 등 환자들이 제때 정상적으로 치료받을 방안을 모색해달라"고 했다.

일부 환자단체와 시민단체들은 최근 정부가 발표한 건강보험 재정 투입안과 의사들의 의료 소송 부담 완화안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이날 민주노총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보건의료노조)은 기자회견을 열고 "의대증원과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를 둘러싼 강대강 대치는 누가 누구를 굴복시켜야 하는 치킨게임이 아니다"라며 고통받는 환자와 국민을 위해 소비자·환자 관련 시민단체, 노동단체, 전문가 등 이해당사자가 폭넓게 참가하는 사회적 대화를 촉구했다.

안 이사는 “의료 개혁 논의에서 환자들이 언급되기 시작한 건 (이번) 문제가 불거진 후부터”라며 “이런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줄도 몰랐다”고 했다.

한편 보건복지부는 BBC 코리아에 정부가 의대 증원 논의 과정에서 소비자단체협의회, 간호돌봄 시민행동 등 환자·소비자 의견도 수렴했다는 입장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