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 '중국의 독설 개혁가' 장쩌민 전 국가주석의 삶과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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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전 국가주석이 11월 30일(현지시간) 향년 96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1989년 유혈 진압으로 끝난 톈안먼(천안문) 시위 이후 국가 지도자가 된 장 전 주석은 10년간 중국의 엄청난 경제 성장과 번영을 이끈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중국이 서방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초강대국 반열에 올라섰다.
장 전 주석은 재임 기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영국으로부터의 홍콩 반환과 같은 굵직한 사건들을 이뤄냈다.
한편 톈안먼 사건 이후 지도자로 발탁된 장 전 주석은 중국 국민들에게 더 큰 민주주의를 바라는 건 용납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현재 중국에선 고강도 코로나19 방역 규제에 반대하며 톈안먼 사태 이후 가장 심각한 수준의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장 전 주석에 대해선 좋게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특히 중국 사회가 점점 더 권위주의적이고 폐쇄적인 색으로 물들어가는 상황 속에서 청년들은 장 전 주석을 비교적 다채로운 성격을 지녔던 인물로 평가한다.
미약한 시작
일본 점령 시기인 1926년 8월 17일 장쑤성 양저우시에서 태어난 장 전 주석은 졸업 후 전기 기술자로 취직했다.
대학 재학 시절이던 21세의 나이에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가족이 혁명 출신 성분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마오쩌둥이 번번이 숙청을 자행하던 상황이었기에 힘든 시절이 됐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구소련 모스크바의 자동차 공장에서 유학하거나, 이후 루마니아에 외교관으로 파견되는 등 장 전 주석은 이 시기 대부분 해외에서 지냈다.
그러다 1980년대 전자공업부 부장으로 임명됐으며, 이후 상하이시 당서기까지 올랐으나 여전히 중앙 국정에선 별다른 존재감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랬던 장 전 주석은 톈안먼 시위를 계기로 남다른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당시 중앙 정부는 청년 시위대의 톈안먼 광장 점령에 어떻게 대처할지 고민하고 있었으나, 장 전 주석은 이미 상하이에서 유사한 시위에 대처한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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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장 전 주석은 현장에서 에이브러햄 링컨 전 미국 대통령의 게티스버그 연설 일부를 인용해 학생들을 놀라게 했을 뿐만 아니라, 시위를 부추긴다고 생각되는 신문사를 폐간 조치했다.
그 결과 무력에 의지하지 않고도 시위가 진압되면서 당시 중국 지도자였던 덩샤오핑의 눈에 들게 된다.
당시 덩샤오핑은 옥신각신하던 파벌 중에서 선택해야 할 상황이었다. 이에 강경파를 선택하고 자유주의자를 숙청하는 한편, 장쩌민을 공산당 총서기로 임명하며 사실상 자신의 후계자로 공표했다.
한편 장 전 주석은 반대파에 강경했다. "민주주의와 인권 모두 상대적 개념이지 절대적이고 일반적인 것은 아니"라는 태도였다.
그러나 당시 중국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던 이들 중 장 전 주석에게 크게 기대하던 이는 많지 않았다. 두꺼운 뿔테 안경, 어딘가 칙칙한 태도, 그리고 바지를 거의 가슴까지 올리는 독특한 스타일 때문에 그저 그런 따분하고 둔한 관료로 보이곤 했다.
정치적 고향인 상하이에선 '화분'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장식은 많지만 행동이 없다는 의미로, 그저 그런 과도기적인 인물로 남을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그러나 장 주석은 그 추측이 틀렸음을 증명했다.
반대파에 대한 태도
한편 개혁의 속도가 느려지거나 심지어 중단될 수도 있다는 우려 속에 덩샤오핑은 장쩌민의 열정에 대해 의구심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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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전 주석은 이 메시지를 제대로 받아들여 새로운 경제 개혁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여전히 정부가 통제하는 시장 경제 형태이긴 하나, 중앙 통제식 사회주의 경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들어왔다.
총서기직,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에 더해 1993년 공식적으로 국가 주석 자리에 오르며 장 전 주석은 중국 3대 요직을 모두 차지해 최고 권력자가 된다.
1997년 2월 덩샤오핑이 사망할 때까지 장 전 주석은 상하이 출신의 자신과 가까운 인물들로 요직을 채우는 등 권력 기반을 더욱 공고히 했다.
장쩌민은 주룽지 당시 총리와 함께 국가를 통치했다.
국내외
그러나 장 전 주석은 중국 정치에서 난무한 책략과 음모로부터 자신의 공산당 내 입지를 굳건히 하는데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장쩌민은 파룬궁을 탄압하고, 대만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며 내부 반대 세력을 탄압하는 한편, "우리 군은 당의 절대적인 지도력 아래 있다"면서도 "인민의 군대"라며 누가 책임자인지 상기시키면서도 중국군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또한 장 전 주석은 여느 중국 지도자처럼 공산당 철학을 만들어 '3개 대표 이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공산당은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어 나가야 한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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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국내에서 권력을 공고히 한 장 전 주석은 이제 중국의 대외 이미지를 올리기 위해 국제 사회로 눈을 돌렸다.
1996년 아시아 경제 포럼에서 피델 라모스 당시 필리핀 대통령과 저녁 식사 후 미국 팝가수 엘비스 프레슬리의 '러브 미 텐더'를 열창하는 등 기억에 남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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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장 전 주석은 논란 속에 중국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영국을 방문했으며, 미국에도 여러 차례 방문했다. 게다가 WTO에 가입하며 중국의 세계 경제 체제 편입을 촉구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을 땐 이에 대한 협조를 약속하기도 했다. 미국과의 우정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지나간 시대의 상징
2002년 11월 장 전 주석은 후진타오에게 총서기직을 내주며 권력 이양 작업에 착수했다. 그렇게 2003년 3월 후진타오가 뒤를 이어 국가주석 자리에 오른다.
2004년 9월 장 전 주석은 중앙군사위 주석직에서도 물러나며 정치 지도 요직에서 모두 물러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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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물러난 장 전 주석은 이후 수년간 거의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던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엔 모습을 드러내며 중국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2012년 권력 승계 문제 논의 과정에서 재등장하는 등 중국 정체에서의 영향력도 유지했다.
2019년 중화인민공화국 70주년 기념대회에 참석했으나, 올해 10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에 불참하면서 건강 이상설이 제기됐다.
한편 장 전 주석은 말년에 많은 중국 청년에게 예상치 못하게 영웅이 됐다.
청년들은 장 주석의 외모를 두고 '두꺼비'라는 별명을 붙여주는 한편 자칭 '두꺼비 숭배자'인 팬클럽도 생겨났다. 이들은 장 전 주석을 중국이 더 자유롭던, 지나간 시대의 상징으로 여긴다.
한편 장 주석의 어두운 면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지적도 있다.
1989년 사태 이후 해외에서 살고 있는 학생 지도자 중 하나인 왕 단은 장 전 주석을 "전형적인 기회주의자 정치인"이라고 평가했다.
왕 단은 트위터에 중국어로 "장쩌민은 개방적인 듯 보였지만, 사실 그는 계획 경제로 회귀하려 했다 … 그러다 덩샤오핑에 의해 제지당한 것이다. 언제나 정치적으론 보수주의자였던 인물"이라고 적었다.
한편 홍콩의 정치평론가 조니 라우는 장 전 주석 정권하에서 중국에 더 많은 개방이 이뤄질 수도 있었다고 언급했다.
라우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장 전 주석은 1989년 톈안먼 사태 이후 권력을 잡았는데, 당시 많은 이들이 중국이 다시 퇴보하는 것 아니냐고 우려했지만, 덩샤오핑의 개혁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어떤 면에선 중국의 발전에 기여한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뒤 정치 개혁에도 착수했어야 했지만, 장 전 주석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추가 보도: 그레이스 초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