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평등: '엄마 성 물려줄 수 있다'…법원, 성 변경 신청 허가

사진 출처, '엄마 성을 물려줄 수 있는 권리' 페이스북
"오늘부터 저희 아이에게 엄마의 성을 물려주게 됐습니다. '멋있다' '나도 하고 싶다'는 말도, '성이 뭐 그리 중요하냐' '유난이다'라는 말도 들었지만, 가부장제 잔재인 부성주의 원칙을 깨기 위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9일 서울가정법원 앞 기자회견에서 어머니 김 모 씨가 한 말이다.
앞서 법원은 자녀의 성·본을 어머니의 성·본으로 바꿀 수 있도록 해달라며 엄마 김 씨와 아빠 정 씨 부부가 올해 5월 낸 '자(子)의 성·본 변경 허가' 청구 사건에서 "이유가 있으므로 허가한다"고 결정했다.
이로 인해 이들의 자녀 정원이는 어머니의 성을 따라 법적으로 '김정원'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됐다.
지난 2013년 10월 결혼한 부부는 혼인 당시에는 자녀 계획이 없었으나, 이후 계획을 세워 올해 5월에 아이를 낳았다.
이들은 임신·출산·육아 과정에서 여성에게 부여되는 책임과 역할이 막중하다는 점에 공감해 아버지의 성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8년 전 혼인신고 때 성·본 협의를 하지 않은 것이 발목을 잡았다.
민법 제 781조 1항은 자녀는 아버지의 성과 본을 따른다고 정한다.
다만 부모가 '혼인신고'를 할 때 어머니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협의한 경우에만 어머니 성을 따를 수 있다.
이들 부부는 결혼 이후 출산 계획이 생긴 부부의 자식은 어머니의 성과 본을 따를 수 없도록 한 것은 타당하지 않다며 법원에 성·본 변경허가 청구를 냈다.

법원은 이번 판결과 관련해 "자녀의 복리를 위해 성과 본을 변경할 필요가 있는 경우, 부모나 자녀 스스로의 청구에 따라 법원의 허가를 받아 변경할 수 있다는 민법에 따른 결정"이라고 판단했다.
부부의 소송을 도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와 '엄마 성을 물려줄 수 있는 권리 모임'은 이날 서울가정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반 가정에서도 엄마의 성과 본을 자녀에게 물려줌으로써 자녀가 입는 불이익보다 이익이 더 크며 궁극적으로 자녀의 복리에 부합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라며 환영했다.
이 자리에는 딸에게 자신의 성을 물려준 이수연 씨도 있었다.
그는 BBC 코리아에 "저희 부부도 아이에게 엄마 성을 물려줬기 때문에 성평등한 가족을 받아들겠다는 부부의 의지를 법원이 받아들여 줬다는 점에서 무척 의미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 씨는 "이전까지의 재판에서는 시간과 비용이 많이 걸리고 기각되는 경우도 많았다고 들어서 이번에도 오랜 싸움이 되겠구나 했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판결이 나와서 놀랐다"라며 "엄마 성 쓰기에 대한 인식이 확산된 것 같다"는 소감을 전했다.
그러면서 "이런 문제의 근원이 되고 있는 민법 781조의 부성 우선주의 원칙 자체가 바뀌는 일만 남은 것 같다"고 했다.
아직은 낯선 엄마 성 쓰기
한국에서도 원칙적으로는 엄마 성을 쓸 수 있게 된 때는 2008년 호주제가 폐지되면서부터이다.
하지만 아기에게 엄마 성을 물려주는 부부는 여전히 찾기 쉽진 않다.
출산이 아닌 혼인 신고 시 자녀 성을 미리 정해놔야 하는 제도의 문제도 있지만, 관습적인 한계도 있다.
그러다 보니 엄마 성을 따르기로 한 사례가 과연 몇 건이나 되는지 관련 통계조차 찾기 힘든 실정이다.
경희대학교 사회학과 정고운 교수는 "한국 사회에서는 아버지의 성, 즉 부계가 문화적 관습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엄마 성은 낯설다"고 설명했다.
정 교수는 "산업화로 친족 관계는 약화하고 있지만, 부부가 여전히 확대가족으로부터 전세금 마련이나 육아 등의 물적·실질적 자원에 의존하는 상황"이라며 "전통적 관념을 지닌 확대가족의 여러 행위자가 개인의 행위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라고 말했다.
하지만 부모가 협의해 자녀 성을 결정할 수 있다는 국민적 공감대는 점점 형성되고 있다.
여성가족부가 지난해 6월 실시한 '가족 다양성에 대한 국민인식조사'에서는 출생신고 시 부모가 협의해 자녀의 성·본을 따를 수 있다 항목에 응답자의 73.1%가 찬성했다.
이에 여성가족부는 올해 4월 제4차 건강가정기본계획(2021~2025)을 확정하며 자녀의 성 결정 방식을 자녀의 출생신고 시 부모 협의로 결정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한편 유엔 여성차별철폐협약(CEDAW)은 한국 부성주의 원칙과 관련해 8차례 걸쳐 문제를 계속 제기해왔다.
한국 정부는 1984년 해당 협약을 비준했지만 '가족성에 대해 부부가 동일한 권리를 가지지 않는다'는 조항을 이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은 대부분 규제 없어
그렇다면 해외 상황은 어떨까.
덴마크·노르웨이·핀란드·스웨덴 등 유럽 국가에서는 부모의 성씨 가운데 하나를 자유롭게 선택하는데, 따로 선택하지 않으면 엄마 성을 따른다.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에게 다른 성 씨를 물려주기도 한다.
스웨덴 청소년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와 그 동생 베에타 에르만의 이름에도 이 부분이 드러난다. 아빠 스반테 툰베리의 성을 따른 그레타와 달리, 베에타는 엄마 말레나 에르만의 성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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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도 자녀의 출생신고 시 부모가 성 씨를 선택한다. 부모의 성이 아닌 새로운 성을 써도 대부분 주에서 규제하지 않는다.
한국처럼 유교 문화 영향을 받은 일본과 중국에서도 부성주의 원칙은 폐기된 지 수십 년이 지났다.
특히 중국에서는 엄마 성씨를 붙여주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대도시 같은 경우는 이런 비율이 더 높은데, 상하이 인구관리소 발표에 따르면 상하이의 경우 2018년에 신생아 10명 중 1명꼴로 엄마 성을 따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