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스타운: '대학살 이후 나는 나의 삶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사진 출처, The Jonestown Institute
- 기자, 조지나 래너드, 켈리-레이 쿠퍼
- 기자, BBC 뉴스
지난 11월 18일은 악명높은 존스타운 대학살의 40주기였다. 당시 기독교 사교집단의 지도자 짐 존스가 운영하는 마을에서 900명 이상이 사망한 사건이다.
40주기를 앞두고 사건의 생존자인 로라 존스턴 콜은 BBC를 만나 그가 어떻게 가까스로 죽음을 모면했는지 그리고 사건 이후 그와 다른 사람들이 삶을 어떻게 재건했는지를 들려주었다.
주의: 이 기사는 사망자들의 사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950년대와 60년대 워싱턴DC에서 자란 로라 존스턴은 활동가들이 낯설지 않았다.
1970년 그가 22세의 나이로 캘리포니아의 '인민사원'에 가입했을 때, 그는 이미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를 벌이다가 최루탄을 맞기도 했고, 블랙팬더와도 일했으며 1969년 그 유명한 우드스탁 페스티벌에도 참가했다.
"제 삶은 혼란스러웠어요. 결혼 생활은 파탄났고 일련의 잘못된 결정을 내린 다음 보다 안전한 환경에서 정치적일 수 있는 곳을 찾고 있었죠."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그는 캘리포니아 북부의 레드우드 밸리에 있는 인민사원의 본부에서 열린 모임에 몇번 참가했고 박애와 인종간 평등을 강조하는 그들의 이상에 끌렸다.
카리스마적인 기독교 설교자였던 짐 존스는 1956년 흑인과 백인이 함께 예배하는 교회 단체로서 인민사원을 인디애나폴리스에 설립했으며 10년 후 캘리포니아로 이를 옮겼다.
존스는 핵으로 인한 종말이 임박했다고 말했고 세상과 유리된 자신의 '사도적 사회주의' 공동체가 종말 이후에도 살아남을 것이라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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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체는 종교적인 곳이긴 했지만 사회주의적 이상에 따라 설립됐다.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신도들에게 의료보험을 비롯한 사회 서비스를 제공했다.
"제가 찾고 있던 공동체였죠. 저는 평등과 정의를 찾고 있었고 거기에는 갖가지 배경과 인종 출신의 사람들이 있었어요." 로라는 말한다.
"1974년 그 사교 지도자 짐 존스는 미국의 모든 마약과 알코올로부터 벗어난 장소를 찾아주고 싶다고 말했죠." 그는 회상한다.
"우린 남아메리카에서 가이아나를 찾았습니다. 우리가 이주하기에 완벽한 나라였죠. 우리가 거주할 수 있는 외딴 지역들이 있는 아름다운 나라였죠."
1977년 로라를 비롯한 수백 명이 '인민사원 농업 프로젝트'로 이주했다. 그 지도자의 이름을 따 '존스타운'으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거기 이주하는 것에 대해서 걱정은 없었어요. 저는 모험을 좋아했고 우림 지역에서 살 기회가 생겨 좋아했죠." 그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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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외의 '사회주의 낙원'은 존스와 신도에게 캘리포니아로 쏠리기 시작하던 언론의 관심을 피해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계속할 수 있게 해줄 곳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약속된 완전한 낙원이 아니었다.
가이아나 북부에 위치한 정착지는 외부와 상당히 떨어진 곳이었으며 농업을 하기에 부족한 점이 많아 자급자족하기가 불가능했다.
신도들은 작은 공동주택에 같이 살았고 타는 듯한 더위 속에서 오랫동안 노동을 했으며 매일 매일의 생활은 점차 정치화됐다.
로라는 존스타운의 주지역에서 1978년 10월까지 살았다.
"거기서 일했던 것은 뜻있고 성취감도 있었어요." 그는 회상한다. "인민사원의 사람들은 제 평생을 같이하고 싶은 사람들이었죠."
"멋진 사람들이었어요. 다른 생존자들은 달리 말할 수도 있지만 저는 행복했어요. 그 부분은 제 삶의 불행한 부분이 아니에요."
10월 말 로라는 짐 존스로부터 가이아나의 수도 조지타운에 있는 교회 본부에서 일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존스타운에서 배로 24시간 가야 하는 거리였다.
그는 존스가 자신의 이주를 계획적으로 지시했다고 여긴다. 존스타운에 대한 여론의 관심이 높아진 데다가 캘리포니아 하원의원 리오 라이언의 방문이 임박했기 때문이었다.
"짐 존스는 라이언 의원의 방문에 대비해 (로라처럼 인민사원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할) 열성 신도들을 찾아서 조지타운에 모아놓았죠." 그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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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Claire Janaro via Jonestown Institute
라이언 의원은 미국에 사는 신도들의 가족들이 자기들의 의사에 반하여 붙잡혀 있다는 우려를 표하자 이를 조사하기 위해 존스타운으로 향하고 있었다.
널리 알려진 한 사례로 존 빅터 스토엔이라는 아이의 부모(존스는 이 아이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가 존스타운에서 도망친 후 자신의 아이의 양육권을 얻기 위해 공개적으로 싸웠다.
로라는 당시 "짐 존스의 정신상태는 악화되고 있었고 존스타운 실험은 실패하고 있었다"고 회상한다.
"사람들이 짐 존스가 자신들의 아이들을 납치했다고 비난했고 그의 비서가 현 상황에 대해 물의를 빚을 만한 정보들을 갖고 도망갔어요."
1978년 5월 존스의 측근이었던 데보러 레이턴 블레이키는 조지타운으로 탈출해 미국 대사관에 난민 인정을 신청했다.
제출한 진술서에서 그는 존스가 "폭군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썼다. 그에 따르면 존스는 한번 마이크를 잡으면 몇시간 동안 미국 정부와 존스타운에서 도망간 사람들과 신도들을 걱정하는 친척들에 대한 음모론으로 가득찬 설교를 늘어놓았다 한다.
그는 또한 거주자들이 식량 부족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때때로 설사와 같은 질환에 시달렸다고 보고했다.
"존스타운은 너무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아요. 우린 1천 명이었죠. 자급자족도 안됐고요. 그래서 짐 존스는 압박을 느끼고 있었어요." 로라는 회상한다.
"그의 약물 중독과 성격장애가 더 악화됐어요. 점차 제기능을 못하고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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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들은 때때로 매주 발생했던 "백색의 밤" 사건들을 회고했다. 존스가 거주지의 안전에 위기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때로는 이 사건들에 집단자살 연습도 포함돼 있었다. 어린이를 포함한 신도들을 줄을 세워 독약이라고 쓰여 있는 음료를 마시게 했다. 나중에 이것이 충성심에 대한 테스트라고 말해주는 것이었다.
11월 라이언 의원이 그곳을 찾았을 때, 그는 인민사원 신도들의 친척들과 이 방문을 기록하기 위해 기자들을 대동했다.
처음에는 반발했으나 인민사원은 조사단의 출입을 허가했고 대체로 괜찮아 보이는 일상을 보여주었다.
조사단의 일원이었던 워싱턴포스트의 기자 찰스 크라우스는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걱정된 친척들'이 우리에게 말한 것과는 달리 누구도 굶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다들 상당히 건강해보였다."
조사단은 거주지 바깥에서 밤을 보내고 이튿날 다시 돌아왔다. 거기서 적어도 열 명이 넘는 신도들이 자신들을 미국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조사단에게 접근했다.
조사단이 귀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총기로 무장한 인민사원 신도 집단이 조사단을 습격해 총격을 가했고 라이언 의원을 비롯한 5명이 살해됐다.
거주구역에서 존스는 900명 이상의 신도들에게 총격 사건으로 가이아나 군대가 침입해 아이들을 잡아갈 것이라고 경고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 종용했다.
연습했던 것처럼 과일음료와 청산가리가 섞인 물병들이 배분됐다.
"짐 존스는 사기꾼이었어요. 모두가 그가 자신의 아버지라고 느끼게 만들었죠." 로라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요. '넌 돌아갈 수 없어. 돈도 없잖아.' 사실이었죠. 다들 모든 돈을 교회에 줬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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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죽었다'
"다들 하원의원이 죽은 것에 대한 파급을 두려워했어요." 그는 말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매일 거짓말을 했죠. 사람들에게 편집증을 주입했어요. 사람들은 달리 의지할 곳이 없었어요."
240km 떨어진 가이아나 본부에서도 신도들은 명령을 받았다.
"짐 존스의 비서였던 섀런 에이모스는 조지타운, 샌프란시스코, 레드우드 밸리에 보낸 라디오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로라는 회상한다.
"그 내용은 이랬어요. '존스타운 전원은 죽고 있거나 이미 죽었다. 다른 모두들도 즉각 혁명적 자살을 수행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바로 지금 수행한다."
로라는 당시 인민사원의 농구 팀 일원으로 가이아나 수도에 있었던 짐 존스의 두 아들이 지시를 따르기를 거부했으며 다른 지부에도 이를 무시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메시지가 도착했을 때 로라는 건물 밖에 있었고 그가 돌아왔을 때는 가이아나의 군인들이 비서와 그의 자식들의 시신을 치우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와 다른 사람들이 조지타운에 있었을 때 그 지시를 받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잘 모르겠어요." 그는 말한다. "우리에겐 선택지가 있었죠. 거리로 나가서 사람들에게 말을 하거나 차를 탄다든지 대사관으로 간다든지 할 수 있었죠."
"만약 제가 당시 존스타운에 있었고 제가 사랑했던 900명이 사람들이 그런 선택을 하는 걸 봤다면 그 이후에도 살아남고 싶어했을 것 같진 않아요."
로라는 본부에서 그들은 존스타운에서 발생한 사망자 수에 대한 보고를 들었다 한다. 처음에는 300명이 죽었다고 했고 이후 600명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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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모두 경악했죠. 다들 울고 있었어요. 제가 여전히 지금 우는 것처럼요." 그는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누가 죽었는지 확인하려고 나갔어요."
"시신들이 어느 외국의 우림 한복판에 널브러져 있었죠. 엉망일 수 있는 건 모두 엉망이었어요. 그들이 정확히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어요. 끔찍할 따름이죠."
비행장에서 발생한 살인과 짐 존스 자신의 죽음까지 합친 총 사망자 수는 918명이었다.
습격에서 살아남은 크라우스는 대학살 현장에 처음으로 들어간 기자였는데 심지어 개와 존스타운에서 애완동물로 키우던 침팬지까지도 주민들과 함께 죽어있었다고 한다.
"나는 존스가 아무것도, 심지어 동물조차도 최후의 공포를 목격한 채로 두지 않겠다고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어떠한 생존자도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는 사건 발생 후 워싱턴포스트에 이렇게 썼다.
2001년 9월 11일 테러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존스타운은 미국 역사상 민간인이 의도적으로 살해된 사건 중 단일 사건으로는 최다 사망자가 발생한 것이었다.

로라는 1978년 11월말 미국으로 돌아가 캘리포니아에 있는 인민사원 공동체로 복귀했다. 그는 그런 결정을 내리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한다.
"그들은 제 가족이었어요. 8년을 같이 살았고 그들을 정말 잘 알았어요." 그는 말한다. "저는 결코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어요. 짐 존스만 죽음에 매몰돼 있던 사람이었죠."
"우리는 이 집단적 트라우마를 함께 헤쳐나갔어요. 서로를 치유하며 헤쳐나가는 게 맞는 일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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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어머니와 동생은 제가 어떻게 인민사원에 들어가게 됐는지 거기서 어떻게 지냈는지 이해하지 못했어요. 슬픔을 이해할 수 없었죠."
1년 정도를 인민사원에서 보낸 후 로라는 다른 공동체에 가입해 그곳에서 남편을 만나 십 년 동안을 살면서 아들을 낳았다.
"그때 전 말했죠. '이제 됐어. 이제 어른이 되고 싶어.' 저는 학교로 돌아갔고 1995년부터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로라는 말한다.
'울타리는 없다'
거의 20년 가까이 당시의 경험에 대해 말하기를 피해왔던 로라는 1998년 마침내 인민사원의 생존자들과 처음으로 만났다.
"그때까지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한 창구가 없었어요." 그는 말한다. "20년 후 우린 마침내 동그랗게 앉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말할 수 있었죠."

사진 출처, Laura Johnson Kohl
"매 주기마다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게 제 삶을 재건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실상 저는 단지 로라 콜이 아니라 인민사원에 갔었고 거기서 살아남았고 여전히 끝내주는 로라 콜이라는 걸 깨달았죠." 그는 말한다.
"저의 일부 그 이상이에요. 나는 인민사원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겁니다. 매일 제 삶의 추동력이 되죠."
"존스타운에 울타리는 없어요. 고칠 수 없는 게 아닙니다."
"저는 짐 존스를 증오할 수 있겠지만 그럼 뭐해요? 그는 이미 죽었어요. 증오를 갖고 사는 건 의미가 없어요."
"그 대신 저는 사람들에게 사교 집단에 대해 교육합니다. 자기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해요."
'고장난 대가족'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이날이 되면 생존자와 그 가족들이 모인다.
"우린 고장이 난 하나의 대가족과 같죠. 짐 존스와 소송이 붙었던 사람이었건 그 최후의 날에 있었던 사람이었건 상관없어요. 우린 생존자이고 그곳을 헤쳐나온 사람들이니까요." 그는 말한다.
"40년이 지난 후에도 우린 여기에 있고 이는 기념할 만한 일이죠."

사진 출처, The Jonestown Institute

사진 출처, The Jonestown Institute
"우리가 모이면 때론 누가 어떤 말을 하거나 다들 같이 노래를 부릅니다. 신성한 시간과 공간이죠.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우린 잊곤 해요." 로라는 말한다.
"살아남은 우리 모두는 짐 존스가 없이도 잘 해나가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어요.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이젠 좋은 친구들을 잃었다는 슬픔이 있어요. 제 평생 알았던 사람들 중 가장 훌륭한 사람들과 가장 헌신했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어요."
"저는 모든 인종과 배경, 모든 사회경제적 수준을 아우르는 정말 환상적인 공동체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1천 명의 사람들을 위한 공동체로 만드는 일을 정말 훌륭하게 해냈어요." 그는 말한다. "그런 공동체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 공동체는 짐 존스에 의존한 게 아니에요. 정말로 헌신했던 사람들에게 의존한 거죠."
"그게 저에겐 많은 희망을 줍니다. 멋진 사람들이 멋진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줘요. 저는 지금도 활동가입니다. 우린 뭔가 다른 걸 해낼 수 있다는 걸 전 알아요. 전 그걸 봤고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