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교황청의 '로마 봉쇄령'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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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 에디슨 베이가
- 기자, BBC 뉴스 브라질
파비오 키지는 지식인이자 예술 애호가였고, 건축에 대한 열정이 넘쳤다. 법률, 신학, 철학박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교황 알렉산데르 7세 자리에 오른 뒤 한 번도 공부한 적 없는 전염병과 맞닥뜨렸다.
가톨릭 교회 수장이 된 그는 이런 상황에 흔들리지 않았고, 전염병이 로마에까지 퍼지자 엄격한 봉쇄령을 내렸다.
현재 연구자들은 17세기 그가 내린 결정이 수천 명의 생명을 구했다고 생각한다. 전염병이 퍼진 다른 도시와 비교해 로마의 사망률이 확연히 낮았기 때문이다.
전염병, 사망률, 그리고 첫 번째 봉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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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비오 키지는 1599년 태어나 1667년 사망했다.
가장 주목할 점은 당시 세균이 전염병의 주범이라는 사실이 아직 인류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부분이다. 1894년 알렉상드르 예르생이 '위대한 발견'을 하기 전의 시대였다.
전염병은 현대 이탈리아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다. 여러 번의 전염병 확산 후 유럽 대륙 인구는 절반으로 줄었다.
이탈리아 역사학자인 로마 라 사피엔차 대학 루카 토피 교수에 따르면, 사르데냐 왕국(유럽 중세 시대 이탈리아 북서부에 위치했던 왕국) 인구의 55%, 나폴리 인구의 절반과 제노바 거주민의 60%가 1656~1657년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반면 2017년 이탈리아 과학 저널에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로마에서 전염병으로 숨진 이들의 비율은 8% 미만이었다. 당시 전체 인구 12만 명 중 9500명이 사망했다.
나폴리 왕국의 전염병 소식이 로마에 전해졌을 당시 알렉산데르 7세는 교황 1년 차였다.
전염병이 퍼졌던 1656년 5월부터 1657년 8월까지 교황은 일련의 방역 조치를 시행했는데, 이는 현재 우리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시행하는 조치와 매우 유사했다.
교황은 가톨릭 교회를 이끌 뿐만 아니라 작은 도시 규모의 바티칸을 넘어 소위 교황령으로 불리는 지역을 지배했다. 오늘날의 로마를 포함해 현대 중부 이탈리아의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는 영역이다.
교황 알렉산데르 7세는 로마에 점진적 방역 조치를 시행했고, 맞닿은 지역들의 상황이 심각해지자 도시 전체에 봉쇄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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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일, 나폴리 왕국의 모든 상거래가 중단됐다. 일주일 후 나폴리에서 로마로의 이동이 금지됐다.
5월 29일, 교황령 내 항구 도시 치비타베키아에서 감염자가 발생하자 즉각 자가격리가 시행됐다.
토피 교수는 "며칠, 몇 달 안에 교황령 내 많은 다른 도시들이 봉쇄됐다"고 설명했다.
로마로 들어오는 거의 모든 관문은 차단됐다. 8개 성문만 군인들의 24시간 경비와 귀족과 추기경의 관리 아래 운영됐다.
로마로 들어오려면 정당한 이유가 필요했고, 출입자는 모두 기록에 남았다.
6월 15일, 로마에 첫 감염 사례가 발생했다. 병원에서 사망한 나폴리 출신 병사였다.
방역 수칙은 즉각 강화됐다. 6월 20일부터 도시 거주민은 감염자가 발생할 경우 즉각 당국에 신고하도록 의무화됐고, 성직자들은 사흘마다 가가호호 연락을 돌렸다. 교구 내 환자들은 감염자 명부에 올랐다.
17세기 스타일의 봉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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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로마 남쪽 트라스테베레에서 한 어민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브라질 교황청 상파울루 가톨릭 대학교 신학생 라일슨 아라우조는 "사망자의 친척들 역시 감염됐고 일부는 사망했다"고 설명했다.
첫 조치는 지역 봉쇄였다.
아라우조는 "전염병이 확산하자 교황은 기타 격리 조치와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했고, 회의, 종교 행사 및 모든 종류의 모임을 금지했다"면서 "외교적 방문은 취소됐고 도로 검문도 진행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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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파울루 상벤투 수도원의 철학자이자 신학생 구스타보 카타니아에 따르면, 당시 야외 시장 운영도 중단됐고, 집이 없는 사람들은 도시 밖으로 내쫓겼다. 해가 진 후 티베 강을 건너는 것도 금지됐다.
교황은 금식도 금지해 도시 인구가 질병에 대비해 잘 먹고 건강해질 수 있게 했고, 감염자가 있는 가족의 구성원은 외출을 금지했다.
아라우조는 "성직자가 질병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고 말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7세는 의사와 성직자로 팀을 나눴다. 환자와 접촉한 팀과 그렇지 않은 팀이다. 후자는 감염 가능성이 적었던 만큼 다른 이들을 방문할 수 있었다.
카타니아는 의료진 역시 감염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의료진들도 로마 밖으로 나가는 게 금지됐다"고 덧붙였다.
격리 중인 사람들을 지원하는 체계도 생겼다.
카타니아는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가구를 위한 경제적 지원이 있었고, 일부 가구는 창문을 통해 음식을 공급받았다"고 했다.
전염병 확산이 절정에 다다랐을 땐, 규칙을 어긴 자에게 사형을 언도하기도 했다.
부정론자들과 가짜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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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모두가 상황을 받아들인 건 아니다.
일부는 규칙을 무시했고 가짜 뉴스를 퍼뜨리기도 했다.
로마 그레고리오 대학 연구원 미르티셀리 메데이로스은 "교황은 전염병을 지어내 인기를 얻으려 한다는 의심을 받았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교황이 엄격한 봉쇄령을 내려 사람들을 놀라게 하길 원치 않았죠."
메데이로스는 교황의 최측근들조차 상황의 심각성이 알려지면 경제가 무너질까 두려워했다고 설명했다.
아라우조는 17세기 부정론자들과 지금의 부정론자들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지적했다.
"일부 상인들은 교황에게 더 많은 제한령을 내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상황을 알리지 말고 덮어서 공포가 퍼지지 않도록 하고, 경제가 지속되게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의료진이 가짜 뉴스를 퍼뜨린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역사가인 브라질리아의 메켄지 프레즈비테리안 대학 빅토르 미시아토 교수는 "교황의 결정엔 정치적 동기가 있었다"고 봤다.
"의료진들은 명예 훼손 혐의로 기소됐고, 전염병 병원에서 일하라는 비난을 받았죠."
교황의 조치는 결과적으로 전염병 확산을 막았다.
전염병과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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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이 막바지에 다다른 1657년은 많은 건물과 기념물을 세워 '교회의 재탄생'을 확고히 하려는 교황 알렉산데르 7세에 의해 화려하게 장식됐다.
가장 극적이었던 건축물은 바로크풍 조각가이자 건축가 조바니 로렌초 베르니니가 설계한 성 베드로 광장의 열주다.
메데이로스는 "당시 교황들이 자신의 힘과 권력을 보여주기 위해 건축을 세웠다. 많은 로마의 위대한 건축물은 모두 이 같은 이유로 세워졌다"고 말했다.
"알렉산데르 7세는 열정적인 예술 애호가이자 베르니니의 친구였습니다. 그의 집권 초기는 전염병으로 흠집이 났기 때문에 우울한 시기의 끝을 보여주기 위해 거대한 일에 투자했던 거죠. 성 베드로 광장의 열주는 교회의 열린 두 팔을 상징합니다."
또 다른 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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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회의 봉쇄령은 이때뿐만이 아니었다.
메데이로스는 "다른 이탈리아 교구들, 특히 콜레라 확산 당시인 19세기에도 유사한 방역 수칙이 내려졌다"고 했다.
앞서 16세기 카를로 보 로메오 추기경 또한 밀라노가 전염병에 포위당하자 엄격한 봉쇄령을 시행했다.
메데이로스에 따르면 가톨릭의 종교행사인 미사마저 사회적 거리두기 수칙을 지켜 치렀다.
"신부는 거리의 모퉁이에서 미사를 집도했고, 신도들은 집 안 창문 옆에서 참석했습니다."
믿음, 권력, 그리고 과학
400년 전 과학은 지금만큼 높게 평가되지 않았다.
미시아토 교수는 "17세기 절대주의(군주가 모든 것에 절대권력을 갖는 체제)가 유럽의 표준이었을 때 정치는 교회와 밀접한 관계였다"며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권력은 완전히 얽혀 있었다"고 분석했다.
"과학혁명이 일어나기 전이었죠. 신성에 대한 믿음은 최고이자 평화와 혼돈 사이에 있는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구원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었고요."
아라우조는 "그래서 알렉산데르 7세의 행동이 그토록 중요했던 것"이라며 "그들은 믿음과 과학 사이의 일치를 보여줬다. 발을 땅에 단단히 붙인 믿음"이라고 덧붙였다.

편집: 에바 온티베로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