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바초프: 사진으로 본 고르바초프의 생애

사진 출처, Getty Images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서기장은 1931년 3월 2일 오늘날 러시아 남부 스타브로폴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집단농장에서 일했던 부모 밑에서 어린 고르바초프 또한 수확기를 몰며 10대 시절을 보냈다.

사진 출처, Getty Images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 재학 중 아내 라이사를 만났으며, 공산당에 가입해 활발하게 활동했다.
졸업 후 스타브로폴로 돌아온 고르바초프는 공산당 내에서 급부상하기 시작한다.

사진 출처, Getty Images
1985년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서기장 취임 1년 만에 사망하면서, 고르바초프는 54세의 나이로 소련의 최연소 지도자가 됐다.
당시 미국을 따라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던 상황에서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는 주요 정책 방향 2가지를 제시했다.
소련은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이뤄야 하며, 이를 위해선 '글라스노스트(개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경기 침체를 해결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강화하면서 처음으로 인민대표대회 자유 선거가 실시됐다.

사진 출처, Getty Images
한편 고르바초프는 냉전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미국의 급격한 군비 증강 속도를 맞추기 위해 매년 수십억달러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985년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을 만나 핵미사일 생산 제한과 두 초강대국 간의 외교 관계 재개를 논의했다.
또한 1979년 소련은 사회주의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파견한 상태였는데, 고르바초프는 수천 명이 희생되며 장기간 지속됐던 전쟁에서의 철수를 명하며 마침표를 찍었다.

사진 출처, Getty Images
1987년 미국 워싱턴 DC로 간 고르바초프는 중거리 및 단거리 지상 발사 미사일 배치를 제한하자는 조약에 서명했다.
해당 조약에 따라 1991년 5월까지 미국과 소련은 미사일 2500여 개를 폐기했다.

사진 출처, Getty Images
서방 세계는 고르바초프의 이러한 개혁 행보를 환영했지만, 그가 집권하던 시기 소련은 점차 해체되기 시작했다. 결국 1991년 크리스마스 이브 날 고르바초프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였고 소련은 공식적으로 해체됐다.
소련 붕괴 이후에도 고르바초프는 국내 및 국외 이슈에 대해 계속 목소리를 높였지만, 러시아 국내에서 보단 해외에서 더 명성이 높았다.
바티칸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만난 고르바초프. 당시 교황은 공산주의와 소련의 영향력에 대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사진 출처, Reuters
고르바초프는 1999년 아내 라이사가 백혈병으로 사망하면서 개인적인 슬픔에 빠지게 된다. 늘 곁에 있던 아내는 그의 정치 개혁에 인간적인 면모를 더해주던 존재였다.
한편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고르바초프는 그의 억압적 정권 운영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사진 출처, Getty Images
고르바초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한창인 지난 30일(현지시간) 수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우크라이나 침공을 두고 옛 소련의 영향력을 재건하려는 푸틴 대통령의 시도로 보는 이들도 있다.

사진 출처, Getty Images
모든 사진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