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반환 25주년: 중-홍 갈등의 역사...5가지 주요 장면

    • 기자, 테사 웡
    • 기자, BBC News, 아시아 디지털 리포터

영국령이었던 홍콩은 25년 전 중국에 반환됐다. 당시 '모국과의 재통일'이라는 기치를 내세웠지만, 반환 이후 홍콩과 중국의 관계는 계속 삐걱거리고 있다.

날로 커지는 힘만큼이나 중국 정부는 홍콩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다.

이에 따라 홍콩에서는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대규모 시위와 분열된 여론이 나타났다.

홍콩 반환 이후 지난 25년의 주요 순간을 되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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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홍콩 반환

중국과 영국 국기 일러스트

홍콩은 150여 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1997년 열린 반환식에서 영국 국기 대신 중국 오성홍기가 게양됐다. 홍콩의 중국 반환을 알리는 것이었다.

본토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동안 홍콩은 세계적인 금융 및 문화 중심지로 성장했다. 수십 년간 고립됐던 공산주의 중국과는 크게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당시 홍콩 시민들은 집회의 자유, 언론의 자유는 물론 일부 지역에서 민주적 선거 등 중국의 권위주의적 통치 하에선 누리지 못했던 권리를 행사했다.

1997년 반환을 코앞에 두고 홍콩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뒤덮였다. 안정적인 미래를 위해 홍콩을 떠나는 시민도 많았다.

그러나 영국과 중국이 체결한 반환 협정에 담긴 약속을 믿고 홍콩에 남은 이들도 많았다.

영국으로부터 홍콩을 돌려받을 당시 중국 정부는 '일국양제' 즉 '한 국가 두 체제' 원칙을 약속했다. 향후 50년간 고도의 자치권과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처음 몇 년간 중-홍 관계는 순조로웠다.

그러나 2001년 거주권 부여 논란(홍콩에서 태어난 중국 본토인의 자녀에게 홍콩 거주권을 부여한다는 내용), 2003년 중국 본토 방문객이 촉발한 사스(SARS·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 사태, 그리고 2005년 본토의 '반분열국가법' 제정 시도 등으로 홍콩 내에선 중국에 대한 불신과 우려가 커졌다.

그리고 2008년 중국 베이징에서 하계올림픽이 열렸다.

2008년: 베이징 하계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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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베이징 하계올림픽은 경제 강국으로 부활한 중국이 세계 무대에서 이를 자랑할 절호의 기회였다.

중국인들은 자랑스럽게 자신이 중국인임을 드러냈다.

홍콩 내 분위기도 비슷했다. 올림픽 성화가 홍콩에 도착하자 중국 국기를 손에 든 홍콩인 수십만 명이 송화 봉송을 환영하고 환호했다.

또한 당시 중국의 화려한 메달 성적 또한 국가적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

가히 중국에 대한 '사랑의 여름'이라 부를 만큼 전례 없이 많은 홍콩인들이 스스로 자신을 중국인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후 상황은 달라졌다.

2012년: '메뚜기'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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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홍콩의 한 일간지는 거대한 메뚜기 한 마리가 위협적인 모습으로 있는 광고 하나를 게재했다.

중국 본토인을 귀중한 곡식을 쓸어가는 메뚜기에 비유한, 경멸적인 시선이 담긴 광고였다.

당시 홍콩 원정 출산길에 오르는 본토인들이 늘어가자 홍콩인들은 이들이 홍콩의 귀중한 자원을 쓸어간다며 반감을 드러냈다.

인구 밀도가 높으며 경쟁적 사회 분위기의 홍콩에선 민감한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홍콩 내 명품 매장에서 돈을 뿌려대고 음식물 섭취가 금지된 홍콩의 지하철에서 음식을 먹는 등 본토 관광객의 무례한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는 이들도 있었다.

이에 앞서 베이징대의 한 교수가 홍콩인을 영국의 "충견"에 비유한 게 알려지면서 중-홍 간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앞선 거주권 부여 논란 및 2003년 CEPA(홍콩-중국 경제 긴밀화 협정) 협정 등에서 비롯된 갈등이 더욱 깊어졌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그러나 이를 앞으로 있을 중-홍 관계의 부침을 보여주는 전조로 생각하는 이들도 많았다. 자존심이 걸린 문제가 된 것이다.

인류학자 고든 매튜는 당시 BBC와의 인터뷰에서 "30년 전 (홍콩인들은) 본토인들을 …시골 촌뜨기로 여겼다. 그러나 이제 홍콩에서 가장 부유한 이들은 본토 관광객과 투자자들"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달라진 상황이 많은 홍콩인에게 충격과 불만을 안겨줬다"고 지적했다.

2014년: 우산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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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환 이후에도 보통선거에 대한 꿈은 여전히 홍콩에서 실현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홍콩인들이 정부 수반인 행정장관을 직접 선출하게 허용하겠다는 중국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2014년 8월, 중국은 자신들이 사전에 선택한 인물 중 행정장관을 선출하라며 말을 바꿨다.

홍콩인들은 이를 엄청난 배신으로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센트럴(홍콩의 도심 지역)을 점령하자"는 구호와 함께 수많은 시민이 몇 주간 매일 밤, 거리로 몰려나와 평화 시위를 전개했다.

그러나 최루탄을 살포해 고압적으로 첫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의 모습에 시민들은 경악했다.

경찰의 이런 선택은 시위를 더욱 부채질한 꼴이 됐다.

경찰의 최루탄 살포 진압에 우산을 펼쳐 맞서는 시위대의 모습은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우산 혁명'이라고도 알려진 2014년 홍콩 민주화 운동 및 청년 민주화 운동가들의 등장을 알린 엄청난 순간이었다.

한편 이를 계기로 중-홍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홍콩 내에선 반중 정서가 더욱 짙어지며, 중국 정부에 더 큰 자치권을 요구하는 "지역주의" 운동이 득세했다.

또한 홍콩 사회는 시위대를 지지하는 '노란색'과 경찰과 본토를 지지하는 '파란색' 진영으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이후 소위 '몽콕 피쉬볼 사건'(몽콕 지역 무허가 식품 판매상을 단속하려는 경찰과 시민들의 충돌)이나 '퉁뤄완 서점 실종 사건'(중국 지도부를 비판적으로 다룬 책을 판매하던 서점 관계자들이 연달아 실종된 사건) 등이 터지며 중-홍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일촉즉발의 긴장 상태는 불과 몇 년 후 결국 폭발했다.

2019년: 홍콩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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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홍콩인들은 '범죄인 인도 법안' 개정에 반대하며 다시 거리에 나왔다.

이른바 홍콩 '민주화 운동'의 시작이었다.

중-홍 갈등을 본질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홍콩 역사상 가장 대규모로 확산된 시위였다.

거리에 나온 시민들은 범죄인 인도법 개정에 반대하며 평화롭게 시위를 펼쳤다. 그러면서 그 무엇보다도 진정한 의미의 보통선거를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시위는 경찰과 일부 시위대의 폭력 충돌로 새 국면을 맞았다. 격화된 시위는 화염병, 최루탄, 물대포 등으로 점철됐다.

불길이 치솟는 시가전이나 경찰의 대학교 포위 등은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몇 달 후, 홍콩을 비롯한 전 세계를 덮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과 집합 규제에 따라 사실상 시위는 진압됐다.

한편 중국 정부는 '홍콩 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키며 국가 "분열", 정권 "전복"으로 간주되는 모든 행위를 금지했다. 사실상 모든 반대 세력을 억누르겠다는 얘기였다.

경찰은 민주화 운동가 및 주요 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몇몇 인사는 해외 망명길에 오르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중국 정부는 '애국자가 다스리는 홍콩'을 내세워 홍콩 선거제를 개편했다. 중국에 충성하는 인물만이 홍콩 입법회(의회) 및 행정장관 선거에 출마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그렇게 올해 5월 경찰 출신 '강경 친중파' 존 리 전 정무사장이 단독 출마해 홍콩 행정장관으로 당선됐다.

특히 시진핑 시대에 들어서 중국의 홍콩에 대한 통제권은 견고해지는 듯 하지만,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자신을 중국인으로 규정한 홍콩인의 비율은 반환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이렇듯 반환 25주년을 맞은 현재, 홍콩인들이 진실로 '모국'을 더 가깝게 느낄지는 의문으로 남아있다.

삽화: 데이비스 수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