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킹이 범죄가 아닌 나라
- 기자, 나리 킴
- 기자, BBC 코리아
*이 영상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재구성해 제작됐습니다*
'전 남자친구가 납치 유기한 반려동물을 찾습니다.'
몇 년 전 V는 '집을 비운 사이 과거 사귀던 남성 S가 집에 침입해 반려동물을 납치해 갔다'라고 경찰에 신고했다.
헤어진 남자친구 S로부터 끈질긴 협박 전화와 문자 등 스토킹에 시달리던 V는 어느 날 집에 들어서자마자 무엇인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늘 문 앞으로 마중 나오던 반려동물이 보이지 않았어요. 이름을 불러도 나오지 않고. 집 안 창문은 모두 열려 있었어요. 식탁에는 칼로 내리찍은 자국이 수십 개 있었어요."
불길한 예감은 현실로 다가왔다.
V의 건물 방범 카메라에 녹화된 영상에 건물 밖으로 나서는 S와 S의 한 손에 꼬리가 잡혀 축 늘어진 V의 반려동물의 모습이 찍혀있었다.
"영상을 보자마자 주저앉았습니다. 손이 떨려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수년이 지난 지금 2021년, V는 반려동물을 끝내 찾지 못했고, 여전히 그날의 공포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V는 그날 이후 S에 대한 접근금지를 신청하고 이사를 했지만, 불과 몇 달 전에도 S로부터 전화가 왔었다고 한다.
어떻게 집요하게 찾아내는 건지 여전히 두렵기만 하다고 했다.
BBC 코리아는 어렵게 V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데이트 폭력'이 '스토킹'으로
V는 전 남자친구 S와 교제 당시 데이트 폭력에 시달렸다고 한다.
욕설 등 언어폭력, 정신적 학대는 얼마 뒤 얼굴과 몸을 피투성이로 만드는 신체적 폭력으로 이어졌다.
그때마다 S는 'V가 자신을 난폭하게 만든다'라며 폭력의 책임을 V에게로 몰아갔다.
"죄책감이 제일 힘들었어요.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자괴감, 창피함, 비난받을까 봐 두려워서 도움을 청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결국 V는 이별을 결심했지만, 헤어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헤어지자는 말에 S는 과도를 꺼내와 V의 얼굴을 그었다. V는 경찰에 신고했지만, S를 고소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보복이 두려웠어요. 경찰서에서 조사받는 것도, 소문이 나는 것도, 제가 처신을 잘못해서 그런 것이라는 비난도 두려웠어요."
이후 S의 스토킹과 폭력은 더욱 심해졌다.
이사를 하고 연락처를 바꾸어도 협박 전화와 문자는 끊이지 않았고, 술에 취한 채 집 앞으로 찾아오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S로부터 끔찍한 문자를 받은 것이다.

'내가 너를 가지지 못하면 아무도 너를 가질 수 없어.'
'죽여버릴 거야. 네 동물 새끼가 무사할 것 같아?'
며칠 후, V가 퇴근 후 집에 왔을 때 반려동물은 보이지 않았다.
"경찰서에 신고하니까, 경찰이 남녀끼리 싸우다가 애완동물 없어진 것 가지고 신고하냐며 전화해서 화해하라는 거예요."
결국 S는 V에 대한 접근금지령과 함께 반려동물을 납치 유기한 '절도죄'만 인정돼 벌금형 30만 원을 받았다.
"반려동물이 그저 30만 원에 달하는 물품에 해당한다고 했어요. 접근금지도 무용지물이에요. 그 뒤로 저에게 여러 번 연락했어요. 이러다가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도 모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수정 경기대학교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가해자의 목적은 여자친구를 괴롭히는 것이다. 괴로움을 가장 많이 느낄 방법을 고안해 낸 것이 여자친구가 애지중지하는 애완동물을 죽이고 유기하는 방법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반려동물 학대도 스토킹 관련 입법에 포함하고 싶었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동물 학대가 중범죄로 여겨지지 않고 반려동물을 여전히 재산으로 보기 때문에 재산을 망가뜨린 정도 이상으로 처벌하기가 어렵다"면서 "스토킹은 맞지만, 스토킹 공식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가장 악랄한 범죄"라고 했다.
한국에서 스토킹이란?
지난 1999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스토킹 처벌법이 발의됐지만,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스토킹 범죄가 발생해도 경범죄 처벌법인 '지속적인 괴롭힘'으로 분류돼 가장 낮은 처벌 강도인 '10만 원 이하 벌금'에 그쳤다. 스토킹 행위를 범죄로 규정해 처벌할 근거가 없었던 것이다.
현직의 한 경찰관은 "현장에서 신고를 받고 나가면 막상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라고 안타까워했다.
이 경찰관은 "지금까지 스토킹 신고로 현장에 나가서 처벌로 이어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라며 "경찰은 정해진 법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인데, 피해자는 가해자를 체포해 달라고 하지만 신고 사안이 '경범죄'에 들어가기 때문에 우리에게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피해자들한테 이 같은 상황을 설명해 주면 피해자는 '어차피 체포하지 못할 거, 괜히 가해자 성질만 건드리는 거 아니냐'라며 보복을 두려워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설명했다.
- 경찰청(2020) 스토킹 범죄 관련 신고 건수 4515건
- 처벌 건수 488건(11%), 무혐의 4027건(89%)
스토킹이 범죄가 아닌 한국에서 스토킹으로 인한 희생자들은 계속해서 발생했다.
2009년 다른 남성과 결혼해 임신한 옛 여자친구를 3년간 스토킹하다가 살해한 남성이 검거되고, 2013년에는 고교 시절부터 짝사랑한 선생님을 수년간 스토킹한 뒤 살해한 20대 남성이 검거됐다. 올해 초에는 인터넷 게임에서 알게 된 여성을 스토킹하다 그 여성과 여성의 어머니, 동생을 살해한 '김태현 세 모녀 살인사건' 등 스토킹 관련 범죄는 멈추지 않았다.
한국에서 발생한 스토킹 살인사건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 2020년 한국에서 한 해 동안 스토킹과 관련된 범죄로 신고된 건수는 4515건에 달한다.
이 가운데 경범죄로 처벌된 건수는 488건으로, 나머지 4027건은 아무런 처벌 없이 사건이 종료됐다. 즉, 단 11%만이 처벌, 나머지 89%는 아무런 처벌 없이 가해자가 풀려난 것이다.
지난해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스토킹 범죄는 2015년 363건에서 2019년 583건으로 증가했다.
10월부터 스토킹은 범죄
올해 3월, '스토킹 범죄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법안이 발의된 지 22년 만에 '스토킹 처벌법'이 통과된 것이다.
법안에 따르면 '스토킹 행위'는 '상대방의 의지와 상관없이, 또 정당한 이유 없이, 상대방이나 그 가족에게 접근하거나 지켜보는 행위'를 뜻한다.
또 '우편이나 전화, 메시지 등 정보통신망 등을 이용해 물건이나 글, 영상 등을 보내 상대에게 불안감이나 공포심을 유발하는 행위'를 말하는데, 이러한 행위가 반복될 경우 '스토킹 범죄'로 분류된다.
스토킹 범죄에 대한 처벌은 3년 이하 징역이나 3000만 원 이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 다만 이 법안은 올해 10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성폭력 대책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정재 국민의 힘 국회의원은 법안이 통과된 것에 대해 "스토킹이라는 행위가 범죄로 인정됐다는 것"이라며 "스토킹 행위와 스토킹 범죄에 각각 정의를 두고, 스토킹 행위에 대해 피해자를 어떻게 긴급보호하고, 가해자에 대해 어떤 처벌을 할지 정의를 둔 것에 의미가 있다"라고 말했다.
김정재 의원은 "지금까지 스토킹 행위가 법 제도권 안에 없었기 때문에 신고해도 무의미했지만, 이제는 신고 시 경찰, 검찰, 법원까지 반드시 조치를 취해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라는 말은 구시대적 사고임을 상기시키며 "이제는 한 번 찍어도 내가 싫다면 싫은 거다. 싫다는 의사를 상대방에 표명했음에도 계속해서 따라다니고 괴롭히는 것은 스토킹 행위다"라고 강조했다.
'갈 길이 멀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 교수는 스토킹 처벌법 통과에 대해 "입법이 된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면서도 "개정은 틀림없이 해야 하는 것"이라며 "스토킹을 범죄로 만들어 가는 첫 번째 단추를 끼운 것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스토킹과 범죄와 관련한 공식적인 명칭이 죄명으로 사법제도 내에 편입이 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며 "이제부터 판례가 쌓여가며,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서 어떻게 개선해 나아가야 할 것인지, 법을 집행해 가며 엄벌이 필요한 조항들을 추가해 가는 방식으로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 예로 '접근 금지'와 같은 임시 조치를 "상습적으로 어기는 가해자에 대한 형사처벌을 할 수 있는 조항이 아직은 없다"면서 "상습 위반자는 현재 과태료만 내면 된다. '내 돈 주고 내가 괴롭힌다'라는 식이다"라면서 개정해야 할 부분임을 지적했다.
그는 또 스토킹 피해자들이 범죄 피해를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범죄 피해가 어떻게 피해자 책임이냐"라고 단호히 말했다. 이어 "피해자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도록 상담 지원을 위해 스토킹 지원법을 여가부에서 만들려는 중이다. 피해자 지원법도 입법되면 상담 지원, 신변 안전, 쉼터 운영 등에 예산 배정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아직 갈 길이 멀다"라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