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세 최고령 피아니스트, 제갈삼을 이끄는 ‘잔심’

- 기자, 김효정 & 윤인경
- 기자, BBC 코리아
"피아노하고 내하고는 하나지, 이거 없으면 어찌 살겠나..."
올해 만 95세로 '국내 최고령 피아니스트'로 알려진 제갈삼 전 부산대 교수.
이달 초 부산 자택에서 만난 제갈 교수는 이 말을 하며 오랜 세월 자신과 함께해온 피아노 앞에 앉았다.
주름이 가득 잡혔지만, 피아노 건반을 가르는 그의 손가락은 가볍고 경쾌했다.
'소녀의 기도'를 칠 때 그의 얼굴에는 꿈을 꾸는 듯한 소녀의 미소가 자리 잡았고, 이어 베토벤의 '월광'을 칠 때는 진중하고 묵직한 눈빛이 내려 앉았다.
제갈 교수는 일제강점기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소학교를 졸업한 뒤 대구사범학교(5년제 중고등 교육기관)에 진학해 14세 때 피아노 특기생으로 뽑혀 교육을 받았다.
피아노 길을 걷게 된 데엔 가족의 영향이 컸다.
십대 시절, 당시 큰 형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월영 학교'라는 야학교를 설립했다. 그의 누나는 그 야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피아노를 연주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 멋진 일이야. 어느 날 누님이 하얀 한복을 입고 야학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는 거야. 그게 내 눈에 천사로 보였어, 천사... 이게 내가 피아노를 하게 된 동기가 됐다고 생각해요."

위기에서 나를 구해준 '음악과 제자'
제갈 교수는 사범 학교 졸업 후 19세 때 대구 수창국민학교에서 음악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한국 전쟁이 일어났다. 젊은 청년이면 누구라도 길을 걷다가 강제로 징집이 될 수 있는 시기였다. 그도 전쟁터로 끌려갈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제자가 그를 살렸다.
"책 사려고 부산 거리로 나왔는데, 딱 잡혀버린 거야. 잡혀갈 긴데 옆에서 어떤 놈이 나를 보고 '선생님!'하고 나를 부른 거야. 그러니까 경찰관이 '뭐? 이분이 너 선생님이야?'한 거지. 그래서 내가 살았다. 그때 교사는 살려줬다고...."
60년이 넘은 이 순간을 그는 여전히 잊지 못한다.
"참 고맙다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이름이 생각이 안 나...하지만 지금까지도 애끓게 생각하고 있지. 그놈 아니면 내가 끌려갔어요"
좌우명은 '잔심'
제갈 교수는 이후 부산여중, 경남여고에서 음악교사를 하다가 부산대 음악학과 교수로 1991년 정년 퇴임했다.
퇴임 이후에도 크고 작은 무대에 서는 등, 지금까지도 연주를 쉬지 않고 있다.
고령으로 시력이 매우 나빠 악보는 보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손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일일이 생각해서 하는 게 아니고 손이 다 외우고 있어. 희한해요, 이게. 젊은 시절 열심히 해놓은 건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다."
최근 아내와 사별하고 기력이 조금 약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오후 피아노 연습은 빼먹지 않는다. '꾸준히 하는 마음'이 그를 지치지 않게 하는 힘이다.
"잔심(殘心)이라는 말이 있어요. 사전을 찾아보니까 이건 꾸준히 하는 마음을 뜻해요. 내가 피아노를 꾸준히 치는 것도 잔심이야. 이 말이 참 좋지."
기네스에 도전하다
지난 7월 제갈 교수는 새로운 도전을 했다.
바로 최고령 연주회 기네스에 도전하는 연주회를 연 것.

100세에 단순히 피아노 연주를 한 기록은 있지만, 음악가가 자신의 이름으로 90대에 음악회를 개최한 건 폴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외에는 없었다. 루빈스타인은 94세에 세상을 떠났다.
현재 기네스 기록 등재는 진행 중이며, 결과는 이후 통보될 예정이다.
그는 "내가 할 수 있으면 해보자, 이런 마음에서 한 것이지 뭔가 도전 의식을 가지고 한 것은 아니다"라며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무리해서 뭔가 도전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매일 피아노 치는 이유는 그거예요. 이렇게 기회가 허락하면 하려고 하는 거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힘이 돼요."
제갈삼 교수는 자신의 연주가 팬데믹 속 2020년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힘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고.
"우리 주변 상황이 어려워지면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 있지. 그래도 기본은 '큰 힘을 믿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라...'이 말밖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