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마약, 무기, 그리고 테러…김정은의 북한을 떠나온 군 출신 엘리트

30년 동안 그는 북한 정찰총국 등에서 "지도자의 눈과 귀, 두뇌" 역할을 하며 최고위층으로 올라갔다
사진 설명, 30년 동안 그는 북한 정찰총국 등에서 "지도자의 눈과 귀, 두뇌" 역할을 하며 최고위층으로 올라갔다
    • 기자, 로라 비커
    • 기자, BBC News, Seoul

오래된 비밀 유지 습관은 김국성의 곁을 아직도 맴돌고 있었다.

김 씨와 인터뷰를 하기까지 수 주간의 논의가 필요했다.

그는 아직도 누가 듣고 있을지 걱정했고, 카메라 앞에선 어두운 안경을 썼다.

우리 취재팀 중 오직 두 명만이 '진짜 이름으로 추정되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다.

30년 동안 김 씨는 북한의 강력한 첩보 기관에서 "지도자의 눈과 귀, 두뇌" 역할을 하며 최고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자신이 당국을 비판하는 자들에게 암살자들을 보냈으며, 심지어 '혁명 자금'을 모으려고 불법 마약 연구소를 지었다고 주장했다.

정찰총국에서 5년간 대좌(한국에서 대령)로 근무했던 김 씨는 BBC에 입을 열기로 했다.

평양의 고위 장교가 주요 방송사와 인터뷰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 씨는 자신이 "빨갱이 중의 빨갱이였다"고 했다.

하지만 계급과 충성심이 북한에선 안전을 보장해주진 않는다.

김 씨는 북한 지도부가 마약 거래에서 중동과 아프리카 무기 판매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단을 동원해 현금을 벌려고 필사적이라고 묘사했다.

그는 북한의 전략과 한국 정권을 목표로 한 공격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또한 북한의 스파이와 사이버 네트워크가 전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BBC는 김 씨의 주장을 독자적으로 확인할 순 없었지만, 그의 신원은 확인했다.

최대한 그의 주장을 입증하는 증거를 찾아냈다.

또한 런던 주재 북한 대사관과 뉴욕 주재 북한 공관에 연락해 입장을 요청했지만, 현재까지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다.

'테러 대책반'

북한 최고 첩보부대에서 김 씨가 마지막으로 보낸 몇 년의 시간을 돌아보면 현 지도자인 김정은이 집권 초기 어떻게 비치고 싶어했는지를 알 수 있다.

김 씨는 김정은 위원장이 자신이 "전사"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하는 젊은이라고 봤다.

북한은 2009년에 '정찰총국'이라는 새로운 첩보 기관을 창설했는데, 이는 김정은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버지 김정일의 뒤를 이을 준비를 하던 시기였다.

총 국장은 김정은이 가장 신뢰하는 보좌관 중 한 명인 김영철이 맡았다.

김 씨는 2009년 5월 한국으로 망명한 전직 북한 관리를 죽이기 위해 '테러 대책반'을 구성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고 말했다.

그는 이 지령이 "김정은이로서는 '최고지도자'라는 전사된 입장에서 그것을 위안해주고 풀어주고 (김정일에게) 만족을 드리기 위한 하나의 행위"였다고 했다.

"극비에 황장엽 선생을 테러하기 위한 TF팀이 꾸려지고 공작이 진행된 것이지요. 저는 직접 지휘, 공작을 수행하는...내 말에 따라서 이 사람들이 같이 협의하고 토론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지요."

2010년 김정일과 김정은의 모습

사진 출처, Reuters

사진 설명, 2010년 김정일과 김정은의 모습

황장엽은 한때 북한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관료였다. 그는 북한 정책의 핵심 설계자였다. 1997년 그가 택한 남한행은 북 입장에서 결코 용서하지 못할 일이었다.

황장엽은 북한 정권에 대해 극도로 비판적이었고, 김씨 일가는 복수를 원했다.

그러나 암살 시도는 빗나갔다.

북한군 소령 두 명이 이와 관련해 한국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북한 당국은 관련 내용을 부인했고 한국이 암살 시도를 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 씨 증언에 따르면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국제사회나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테러는 최악의 인권유린 행위로 간주하고 있잖아요. 북한에서는 그렇게 간주하고 있지 않습니다. 북한에서 테러는 김정일 김정은 최고 존엄을 수호하는 정치수단 도구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 2010년에는 대한민국 해군 함정 천안함이 어뢰에 맞아 침몰해 46명이 목숨을 잃었다.

북한 당국은 항상 개입설을 부인해왔다.

그해 11월에는 북한에서 날아 온 수십 발의 포탄이 남한의 연평도를 강타했다. 군인 2명과 민간인 2명이 사망했다.

누가 그 공격을 지시했는지 논쟁이 크게 일었었다.

김 씨는 "천안함이나 연평도 작전에 직접 관여한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정찰총국 일정한 간부들 속에서는 비밀이 아니고 통상적인 자랑으로 긍지로 그렇게 알고 있는 문제"라고 했다.

그러한 작전은 상부의 지시가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절대적으로 북한에서는 도로 하나 만들어도 최고지도자의 재가(허락)가 없이는 할 수 없어요. 하물며 천안함 폭침이라던가 연평도 포격이라던가 이런 것은 충성심 경쟁으로 할 일이 못 된다"며 "이런 것은 반드시 김정은이 특별 지시에 의해 공작되고 이행된 군사작품이지요. 성과품"이라고 말했다.

'청와대 스파이'

김 씨는 정찰총국 외 노동당 작전부, 35실과 대외연락부 등에서 30년간 일하며 주로 대남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북한에서 자신의 책임 중 하나가 한국에 대응하는 전략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목표는 '남조선의 정치예속화'였다.

그는 "직접적으로 대남간첩을 만들고 그것을 통해서 공작적 임무를 수행한 것은 여러 건 된다"고 했다.

그는 자세히 설명하진 않았지만 흥미로운 예를 하나 들었다.

"청와대에도 북한에서 파견한 직파공작원들이 근무하고 무사히 북한으로 복귀한 사례도 있습니다. 그것이 1990년대 초지요. 청와대에 근무하면서 5~6년 근무하고 무사히 복귀해서 들어와서 314 조선노동당, 314 연락소라고 있어요. 거기서 근무했죠."

"그렇게 북한이 북파공작원이 남한의 구석구석 중요한 기관들 물론이고 시민사회단체 여러 곳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다 이렇게 말씀할 수 있습니다."

김정은

사진 출처, Reuters

사진 설명, 김 씨에 따르면 모든 외화벌이는 북한 지도자 김정은에게 들어간다

BBC가 현재 이 주장을 입증할 방법은 없다.

취재진은 한국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북한 간첩을 몇 명 만났다.

NK 뉴스의 설립자인 채드 오캐럴이 최근 기사에서 지적했듯이, 한국의 교도소는 한때 다양한 종류의 간첩 활동으로 몇십 년에 걸쳐 체포된 수십 북한 간첩이 많았다.

여러 사건이 계속 발생했으며 최소한 한 개 정도는 북한에서 직접 파견된 스파이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NK 뉴스 데이터에 따르면 북한이 정보 수집을 위해 구식인 간첩이 아닌 신기술에 눈을 돌리기 때문에, 2017년 이후 한국에서 간첩 관련 범죄로 체포된 사람들은 눈에 띄게 줄었다.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고립된 국가 중 하나일지 모르지만, 탈북자들은 북한이 숙련된 해커 6000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창설했다고 경고했다.

김 씨에 따르면,​ 전 북한 지도자인 김정일은 1980년대에 "사이버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신병 훈련을 지시했다.

"모란봉 대학은 6년제로 돼 있는데 전국 각지에서 가장 수제적인 학생들을 선발해가지고 6년 동안 특수교육을 합니다."

영국 보안 관리들은 '라자루스 그룹'이라고 알려진 북한 조직이 2017년 NHS와 전 세계 다른 기관들을 무력화시킨 사이버 공격의 배후에 있었다고 믿고 있다.

이 조직은 2014년에는 소니 픽처스를 해킹 대상으로 삼았다.

김 씨는 이러한 '임무'를 담당하는 곳이 414 연락사무소로 통한다고 했다.

"414 연락소는 내적으로는 어떻게 부르고 있냐, 김정일의 정보통신처로 말하고 있어요."

그는 이 사무소가 북한 지도자와 직통 전화선을 가진 사무실이었다고 주장했다.

"그 요원들은 언론상에는 중국, 러시아, 동남아 나라들에 나가 있다고 하는데, 그 외에도 북한에서 직접 임무를 수행합니다."

달러벌이를 위한 마약

김정은은 최근 국가가 다시 한번 '위기' 상황이라고 발표했으며, 지난 4월 인민들에게 또 다른 '고난의 행군(1990년대 김정일 집권 당시 북한이 겪은 극심한 기근)"을 준비해달라고 일렀다.

당시 김 씨는 작전부서에 있었고 최고 지도자를 위한 '혁명 기금'을 조성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그것이 불법 마약 거래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에서 마약을 집중적으로 김정일 시대에 생산한 것은 고난의 행군 시기"라면서 "그때 작전부에서는 김정일이 혁명 자금이 바닥칠 때"였다고 설명했다.

"그 과업을 제가 받고 해외에서, 밝혀야 되겠는지 안 밝혀야 되겠는지 일단 접어놓고, 3명의 외국인을 북한으로 들여와서 북한에서 조선노동당 715 연락소라고 있습니다. 거기에 훈련관에 생산기지를 만들어 놓고 마약을 생산했죠."

"아이스('필로폰'을 지칭하는 은어)라고 알죠? 그걸 달러로 만들어가지고 김정일이 혁명자금으로 바쳤죠.

1990년대 북한의 장기간 식량난으로 인한 사망자는 수십만에서 많게는 30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출처, Getty Images

사진 설명, 1990년대 북한의 장기간 식량난으로 인한 사망자는 수십만에서 많게는 30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마약 거래에 대한 그의 설명은 그럴듯했다.

북한은 오랜 마약 생산 역사를 지니고 있다. 주로 헤로인과 아편이다.

망명한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를 지낸 태영호 국민의 힘 의원은 2019년 오슬로 자유포럼에서 북한 당국은 마약 밀매에 관여했고 북한 내부에 만연한 마약 중독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씨에게 마약으로 번 돈이 어디로 갔는지 물어봤다. 실제로 북한 인민을 위한 자금으로 쓰였을까?

"참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북한에는 모든 돈이 김정일이 김정은이 개인 것입니다. 그 돈을 가지고 자기 별장도 짓고 차고 사고 먹기도 하고 입기도 하고 향수를 누리는 거죠."

1990년대 북한의 장기간 식량난으로 인한 사망자는 수십만에서 많게는 30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김 씨 설명에 따르면, 또 다른 수입원은 작전부가 관리하는 이란 불법 무기 판매에서 나왔다.

그는 북한이 "특수소형잠수함, 반잠수함, 유고급 잠수함을 아주 첨단화시켜가지고 잘 만든다"고 했다.

거래가 잘 돼서 북한 관리가 이란 총참모장을 불러서 판매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북한 전문가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에 따르면, 1980년대부터 이란과의 북한 무기 거래는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심지어 여기엔 탄도 미사일도 포함됐다고 한다.

북한은 국제사회의 가혹한 제재에도 불구하고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지속해서 추진해 왔다.

9월에는 신형 장거리 순항미사일, 탄도미사일의 열차발사시스템, 극초음속미사일, 대공미사일 등 4개의 신형 무기체계를 시험 발사했다.

그 기술은 점점 더 정교해지고 있다.

김 씨는 북한이 또한 장기간의 내전을 치르고 있는 국가들에 무기와 기술을 판매했다고 했다.

최근 몇 년간 유엔은 북한이 시리아, 미얀마, 리비아, 수단에 무기를 공급하고 있다고 비난한 바 있다.

유엔은 북한에서 개발된 무기가 세계 곳곳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평양 만수대언덕에 있는 김일성과 김정일 동상을 찾은 북한 주민들

사진 출처, Getty Images

사진 설명, 평양 만수대언덕에 있는 김일성과 김정일 동상을 찾은 북한 주민들

김 씨는 북한에서 특권층의 삶을 살았다.

그는 김정은의 고모에게서 받은 벤츠 차량을 사용했고 북한 지도자를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해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희귀 금속과 석탄을 팔아 수백만 달러의 현금을 모았다고 말했다. 그 돈은 여행 가방에 담겨 북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식량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빈곤한 나라에서 이런 생활을 영위하거나 이를 상상할 수 있는 사람조차 거의 없다.

김 씨는 결혼을 통한 강력한 정치적 인맥 덕분에 여러 정보기관을 오갈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그와 그의 가족도 위험에 처했다.

2011년 집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김정은은 자신의 숙부인 장성택을 포함해 그가 위협 요소로 여긴 사람들을 숙청하기로 결정했다.

김정일의 건강이 쇠약해짐에 따라 장성택이 북한의 실질적인 지도자라는 추측이 오래 지속됐다.

김 씨는 장성택이 김정은의 이름보다 더 널리 퍼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 '아 이 장성택 오래 못 가겠다.' 했죠. 유배 보내지 않겠나 그런 생각을 했죠."

그러다 2013년 12월 북한 관영 매체는 장 씨가 처형되었다고 발표했다.

그 소식을 듣고 김 씨는 "놀란다는 표현을 떠나서, 너무 치명적이고 경악했다"고 한다.

"이제 신변의 위험을 확 느끼게 된 거죠, 내가 더이상 북한에서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로구나..."

신문에서 장성택 사형에 관한 기사를 읽었을 때 김 씨는 해외에 있었다.

그때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도피할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그는 "자기 조상의 무덤이 있고, 혈육이 있고, 제가 태어난 조국을 버리고, 비록 대한민국이라고 하지만, 그때 당시는 이국 땅이었죠, 망명한다는 것은 최악의 비통한 결단에 의한 고충이었습니다."

검은 안경 뒤에 가려졌지만, 이 기억이 그에게 힘들었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여러 시간에 걸친 BBC 제작진 회의에서도 계속 언급된 부분이었지만, 우리는 그가 왜 지금 인터뷰를 하기로 했는지가 궁금했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의무입니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북방 동포들을 독재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키고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앞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겠습니다."

그는 이와 관련해 "내가 할 의무가 이것밖에 없다"고 했다.

"앞으로 난 더 활발한 활동으로 북한 동포들을 독재의 억압에서 해방하고, 참다운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전심하려고 지금과 같은 인터뷰에 응한 것 입니다."

한국에는 3만 명이 넘는 탈북자가 있다. 그중 소수만이 언론에 입을 연다. 이름이 알려진 인물일수록 당사자와 가족에 대한 위험이 커진다.

물론 한국에서도 탈북자의 증언을 의심하는 사람이 많다.

누가 자신의 이야기를 진정으로 입증할 수 있을까? 김 씨는 매우 특이한 삶을 살았다.

그의 설명은 전체가 아니라 북한의 일부 계층의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소수만이 탈출할 수 있는 북한 체제의 내부를 보여주고 체제 생존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려줬다.

그는 "사고방식, 수령에 대한 절대적 복종이 그대로 가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세대에 걸쳐 "신격화된 충성심"을 낳는다.

그가 인터뷰한 시점 역시 흥미롭다. 김정은은 특정 조건이 충족된다면 가까운 시일 내에 한국과 대화할 용의가 있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 김 씨는 경고했다.

그는 "지금 내가 여기 와서 수년 잘 됐는데,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고 했다.

"전략에 따라 지금 흐름세가 가고 있는 거죠. 우리가 다시 알아야 할 것은 북한이 지금까지 0.01% 바뀐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