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교포 북송: 60년 전 오늘, 975명이 배를 타고 북한으로 이주했다

재일교포 북송

사진 출처, ICRC ARCHIVES

사진 설명, 북송되는 재일교포.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약 9만3천여 명의 한인들이 북한으로 이주했다
    • 기자, 김형은
    • 기자, BBC 코리아

1959년 12월 14일, 재일교포 975명은 일본 니가타 항에서 '귀국선'에 몸을 실어 북한 청진항으로 향했다.

배에는 '재일 조선 공민들의 귀국을 열렬히 환영한다'라는 문구가 걸려있었다. 북한 측이 마련한 것이었다.

엄밀히 말해 '귀국'은 아니었다. 이들 대부분은 북한이 아닌 남한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재일교포 2세대와 그들의 일본인 아내들에게는 낯선땅이었다.

그래도 상당수는 희망에 차있었다. 일본에서 온갖 차별과 경제적 어려움 가운데 살고 있던 이들에게 친북단체인 조총련과 북한은 집과 일자리를 보장하며 '지상 낙원'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후 1984년까지 180여 차례에 걸쳐 재일교포 약 9만3천여 명이 북한으로 이주했다. 1962년 북송선을 타고 건너간 사람 중에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어머니인 고용희(1952~2004)도 있었다.

이들 중 몇 명이 북한에 남아있는지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자발적 귀국 혹은 기획된 북송

"김일성대학에 보내준다고 해서 갔어요. 하지만 거짓이었습니다. 함경북도 제일 꼭대기인 웅기의 기계공장에서 옥수수밥을 먹으며 힘겹게 살았어요"

김행일 북송재일교포협회 명예회장은 BBC 코리아에 이같이 말했다. 1961년 6월 북송된 김 씨는 당시 20살이었다.

"일본에서도 조선인이라고 놀림 받으며 살았지만 북한에서의 (대우는) 말도 못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귀국선에 승선한 여성

사진 출처, ICRC ARCHIVES

사진 설명, 귀국선에 승선한 여성

김 씨는 결국 62년 11월 군사분계선을 넘어 한국으로 귀순했다.

"얼마 안 돼서 탈출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꾸 재일교포들이 북송돼서 오니까 이 사실을 재일교포들에게 알려야겠다 싶었어요."

일본에 가려고 했지만 비자가 나오지 않아 결국 한국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차별과 인권 유린에 시달려

1년 만에 탈출한 김 씨보다 북한에 더 오래 있었던 북송 재일교포들은 가난보다 차별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고 주장한다.

3살 때인 1963년 부모를 따라 북한에 갔다가 2002년에 탈북한 고정미 씨는 지난해 미국의 소리(VOA)와의 인터뷰에서 "째포요 반쪽발이요. 그것부터 시작해서 사상이 나쁘다. 뭐 조금만 이상한 소리 하면 어디로 갔는지 정치범 수용소에 갔는지 죽었는지 행방불명 됐다"고 말했다.

재일교포 북송

사진 출처, ICRC ARCHIVES

사진 설명, 환송 인파. 인공기를 든 것이 눈에 띈다

유엔 북한인권 조사위원회(COI)는 2014년 최종보고서에서 이들은 출신배경 때문에 "적대적"으로 분류되었고 차별받았다며 "상당수는 낮은 사회적 신분으로 고난의 행군 시 첫 희생자가 됐을 것"이라고 썼다.

보고서는 일본인 아내들에게 3년 후 귀국할 수 있다고 했던 당초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1960년 중반 이후부터 북송된 이들은 비록 자신들이 자발적으로 갔지만 의사에 반해 북한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썼다.

이들은 왜 북한행을 택했을까?

유엔 자료에 따르면 1945년 해방 당시 일본에는 약 240만 명 정도의 한인들이 살았다. 일제 식민지 시대 강제로 징용·징병됐다가 남게 된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주로 힘겹게 살았다. 김귀옥 한성대 교수에 따르면 1952년 재일조선인 경제활동인구 가운데 무직자 비율이 62%였다.

당시 북한은 조총련을 설립했고, 조총련이 주로 재일교포에게 교육과 직업의 기회를 마련해줬다. 상당수 한인이 조총련에 충성하고 북한을 조국으로 택하게 된 배경이다.

재일교포 북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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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도쿄 우에노 역에서 니가타항으로 향하는 재일교포

당시 일본과 북한 모두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패전 후 힘든 재정 상황 가운데 재일교포들을 부양하는 부담을 안고 있었고 북한은 재일교포를 데려온다면 더할 나위 없는 체제 선전 효과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59년 양국 적십자사는 '재일 한인 북송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고, 조총련과 국제적십자위원회(ICRC)가 대대적인 북송사업 진행을 도왔다.

하지만 2004년 기밀해제 된 ICRC 자료를 검토한 테사 모리스-스즈키 호주국립대 일본역사학 교수는 북송 사업 배후에는 일본 정부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북한행 엑소더스'

사진 출처, Screen grab

사진 설명, 테사 모리스-스즈키 호주국립대 일본역사학 교수의 북송 재일교포 관련 책, '북한행 엑소더스'

모리스-스즈키 교수는 WSJ 기고문에 당시 정치인 출신 일본 적십자사 간부였던 이노우에 마수타로를 인용하며 일본 정부는 당시 재일교포가 일본을 떠나기를 바라고 있었고, ICRC에 수년째 압력을 가해 북송사업을 돕게 했다고 말했다.

1956년 일본 국회 통계에 따르면 당시 실제로 북한행을 원했던 재일교포는 2천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일본 관료들은 1955년부터 ICRC에 최소 60만 명의 북한 출신 재일교포가 고향에 돌아가기를 희망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폭동과 민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내용의 정부 허가 문서를 ICRC에 보냈다.

북한에는 몇명이 남았나?

스즈키 교수에 따르면 북송된 자 중 약 100여 명이 일본으로 탈출했고 상당수는 한국으로 탈북했다. 한국 통일부는 BBC 코리아에 한국으로 탈북한 북송 재일교포 수는 파악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10살 때 북송선을 타고 북한에 건너갔다 탈북해 2009년부터 한국에 살고 있는 이태경 재일북송피해가족협회 회장은 12일 일본에서 열린 북송 60주년 기자회견에서 "추정으로는 1만5천여 명 정도의 북송 교포들이 모진 목숨을 이어가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디어 평양' 스틸컷. '디어 평양' 스틸컷. 아들 셋을 북한으로 보낸 아버지에 초점을 둔 영화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스틸컷

사진 설명, '디어 평양' 스틸컷. 아들 셋을 북한으로 보낸 아버지에 초점을 둔 영화다

이날 기자회견을 주최한 '북송 교포 인권을 위한 한일모임'은 북송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북송 교포 중 사망자, 생존자, 수감자, 피해 사례 등에 대해 정확한 실태조사를 시작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태경 회장은 데일리NK에 그동안 많은 북송 재일교포 단체들이나 인권단체들이 일본정부를 대상으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했지만 "실질적으로 해결된 것은 없다"고 했다.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은 공소시효 만료였지만, 이 회장은 일본 정부가 일본인 납치자 문제와 다르게 북송 재일교포 문제는 "오히려 누르고 있다"며 이를 인정하면 "북송 재일교포에 대한 인도적 범죄를 시인하는 게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재일교포 북송

사진 출처, ICRC ARCHIVES

사진 설명, 이들 중 일부는 일본과 한국으로 탈출했다. 북한에 생존한 이들이 몇 명인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