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숙 차펠: 입양아 출신인 그가 영국 극작가가 되기까지

영국에서 극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인숙 차펠은 태어난 지 18개월 만에 영국으로 입양됐다

사진 출처, Min Kim

사진 설명, 영국에서 극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인숙 차펠은 태어난 지 18개월 만에 영국으로 입양됐다
    • 기자, 서명진
    • 기자, BBC 코리아

딱 떨어지는 원피스, 아무런 장식 없는 핸드백 그리고 윤기 나는 검은색 단발 머리. BBC 본사를 찾은 그의 첫인상은 단아했고 빈틈없었다.

그 어느 해보다 무더웠던 2018년 런던의 여름. 영국 국립극장(National Theatre) 무대에 작품을 올린 한국인 입양아 출신 극작가 인숙 차펠(44)을 BBC 코리아가 만났다.

인터뷰에 앞서 "대접할 게 인스턴트 커피 밖에 없다"는 기자의 말에 그는 "인스턴트 커피면 충분하다"며 털털한 웃음을 지어 보였고 커피 한 모금과 함께 본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동영상 설명, BBC 본사에서 진행한 인숙 차펠과의 인터뷰. BBC 코리아가 그의 인생을 되짚어봤다

한국 입양아 출신인 인숙 차펠(44)은 태어난 지 18개월 만에 영국으로 입양됐다.

당시 입양 서류에 적힌 그의 이름은 '영희'. 양부모는 그에게 '루스(Ruth)'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줬지만, 그는 "왠지 맞지 않는 옷 같았다"며 성인이 되어 '인숙(In-Sook)'으로 개명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어린 시절 양어머니의 권유로 한동네에 살던 한국인 아주머니께 한국어를 배우게 됐습니다. 당시 그 아주머니 이름이 인숙이었습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성인이 된 후 정체성을 찾고 싶다는 생각은 점점 깊어졌고, 나에게 맞는 옷부터 찾아 입기로 했습니다. 바로 이름을 바꾸기로 한 겁니다. 인숙이란 이름의 뜻도 내용도 몰랐지만, 들으면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인숙'으로 바꾸게 됐습니다."

동영상 설명, 영국 극립극장 무대에 올려진 인숙 차펠의 'The Free 9' 연극 하이라이트 영상

지난 6월29일 영국 극립극장(National Theatre) 무대에 올려진 인숙 차펠의 연극 'The Free 9'은, 2003년 북한에서 라오스로 탈북한 꽃제비 출신 탈북 고아 9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국 국립극장은 매년 청소년들을 위한 커넥션스(Connections)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선정된 10명의 작가들은 청소년들이 직접 연기할수 있는 시나리오를 집필합니다. 올해는 저에게도 러브콜이 왔고 문득 몇 년 전 언론보도를 통해 알게 된 탈북 고아 9명이 떠올랐습니다. 작가라는 특성상 어떤 사건을 보면 이를 연극으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청소년, 꽃제비, 자유'가 모여 'The Free 9'을 집필하게 된 겁니다."

인숙 차펠의 'The Free 9'은 영국 국립극장 공연을 시작으로 영국 전역에 있는 28곳의 청소년 극단 무대에 올려지게 된다.

그는 "집필한 연극 대본이 차세대 연극배우인 청소년들에 의해 공연되는 것이 기쁘다"고 말했다. 또 "무엇보다 강제 북송된 탈북 고아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게 돼 뿌듯하다"고 덧붙였다.

공연장에는 각계 각층 시민들이 모였다. 이들 대부분은 "3년 전 라오스에서 북한으로 강제 북송된 탈북 고아 9명의 이야기를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사진 설명, 공연장에는 각계 각층 시민들이 모였다. 이들 대부분은 "3년 전 라오스에서 북한으로 강제 북송된 탈북 고아 9명의 이야기를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앞서 그는 여러 차례 한국과 관련된 작품을 써왔다. 첫 작품 '이건 로맨스가 아니야'는 어릴 적 국제입양으로 헤어졌다가 25년 만에 만난 두 남매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해 그는 2007년 영국 신인 극작가 등용문인 베리티 바게이트 어워드(Verity Bargate Award)를 받았고 이후 이 작품은 BBC 라디오 드라마로 제작된 바 있다.

그는 이후 북한 연인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평양' 그리고 영국인과 탈북소녀의 우정을 그린 '꽃제비'를 집필했다.

인숙 차펠은 "사실 어린 시절 꿈은 무용가였다"며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앨빈 에일리 댄스 학교(Alvin Ailey School)에서 현대무용을 공부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무용은 본인의 능력 밖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이후 연극배우로 전향해 영국 국립극장 소속 단원이 됐지만 "늘 캐스팅의 장벽에 부딪혔다"고 말했다.

그는 "동양 여성이 연극무대에서 맡을 수 있는 역할은 한정적이었다"며 본인의 꿈과 현실이 충돌해 "답답했다"고 말했다.

"무작정 캐스팅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무대에 올리는 연극 대본을 직접 써보자, 현실에서 펼치지 못했던 꿈을 연극 대본에 펼쳐보자"라는 결심을 하게 됐고, 본인의 첫 번째 연극 '이건 로맨스가 아니야'를 집필하게 됐다고 말했다.

인숙 차펠은 영국 국립극장에서 선정한 커넥션스 프로젝트 참여 작가 중 한명이다

사진 출처, NATIONAL THEATRE

사진 설명, 인숙 차펠은 영국 국립극장에서 선정한 커넥션스 프로젝트 참여 작가 중 한명이다

"글을 쓴다는 건 정말 힘든 작업입니다.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95%의 시간은 창작의 고통과 맞서야 합니다. 벽을 쳐다보며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지루한 시간이 흘러야 겨우 완성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글입니다."

커피를 다 마셔갈 때쯤 "친부모를 찾을 생각이 있느냐"는 기자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그는 "2001년 한국 정부 초청으로 국제 한국인 입양아 행사에 참석했지만, 당시 사귄 친구들이 친부모를 찾은 후 오히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봤다"며 "친부모를 찾는 일은 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현재 인숙 차펠은 현재 영국에서 스위스인 남편과 딸 오드리 양과 함께 거주하며 차기작 집필에 매진하고 있다.

"오드리를 낳고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행복함을 느꼈습니다. 나의 진짜 이름, 내가 차마 쓰지 못한 본명 '영희'는 사랑하는 딸 오드리에게 선물했습니다. 저희 딸 이름은 오드리 영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