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커상 최종후보 정보라 작가: '취미는 데모, 소설 쓰는 정보라와 무관하지 않죠'
- 기자, 구유나
- 기자, BBC 코리아
'취미가 뭐냐'는 질문에 "데모"라고 대답하는 사람을 만났다. 영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저주토끼(Cursed Bunny)'의 정보라(46) 작가다.
지난달 '저주토끼'는 2022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르며 정씨에게는 '행운의 토끼'가 됐다. 1998년 연세문화상 수상작 '머리'부터 2016년에 쓴 '저주토끼'·'안녕 내 사랑'까지 단편소설 10편을 묶은 작품이다.
SF부터 호러까지, 장르를 하나로 정의하긴 어렵지만, 현실 부조리에 뿌리를 뒀다는 점만큼은 같다. 심사위원들은 '저주토끼'를 이렇게 평가했다.
"호러, 판타지, 비현실 등 다양한 요소를 혼합하면서도 일상에서의 공포와 압박에 본능적으로 뿌리를 두고 있다."

사진 출처, Bora Chung
'데모하는 작가'
정씨가 현실을 마주하는 곳은 시위 현장이다.
그는 BBC에 "처음에는 '데모하는 정보라'와 '강의하는 정보라', '소설 쓰는 정보라'를 구분하려고 많이 노력했다"고 말했다.
"시위 현장에 가서 제가 뭔가 괜찮은 일을 하는 게 아니고, 그냥 다른 분들 말씀 듣고 다른 분들 하시는 거 보는 거거든요. 근데 굳이 분리할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 2~3년 전부터는 데모하는 얘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작가의 시위 경험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난 저서 중 하나가 2021년 출간한 중·단편집 '그녀를 만나다'이다. 시위에 자주 참여하는 할머니가 테러 용의자로 지목되는 이야기를 담았다.
'작가의 말'에서부터 소설보다 시위에 관한 얘기가 더 많다.
2020년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시위에서 오체투지(바닥에 머리·가슴·발·다리·배가 닿도록 엎드리듯 절하는 것)를 했다는 그는 "법이 제정될 때까지 오체투지를 해야 했다면 나는 이 책의 교정도 못 보고 작가의 말도 못 쓰고 지금도 오체투지를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시위의 한 단편은 우주 전쟁 대서사시로 다시 태어나기도 한다. 그는 2015년 세월호 1주기 집회 때 유가족들과 광화문 현판 밑에 앉아 경찰이 차벽을 설치하고 물대포를 쏘는 광경을 보면서 장편소설 '붉은 칼'(2019) 공성전 장면을 생각해냈다.
정씨는 2013년 철도 민영화 반대 집회를 시작으로 세월호 추모 및 진상조사 요구, 성소수자 인권 보장,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해고노동자 복직, 차별금지법 등을 지지하는 여러 집회에 참석했다.
그는 "(집회에) 너무 많이 가서 기억이 잘 안 난다"며 "내일도 경복궁 앞에 선전전을 하러 갈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출처, The Booker Prizes
정보라표 '판타지'의 원천
수록작 '저주토끼'에서 귀여운 토끼 인형은 무고한 경쟁사를 음해해 무너뜨린 대형 주류회사 회장 집에 숨어들어 서류와 수표 등을 갉아먹다가 마침내 '다른 무엇'까지 갉아먹기에 이른다.
이처럼, 정씨의 냉엄한 현실 인식은 환상 세계 속에서 꽃핀다.
"어릴 때부터 동화나 신화 같은 신비로운 옛날 얘기를 좋아했어요. 그런 일들이 마치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인 것처럼 진지하게 기록돼서 1000년, 1500년 뒤에도 전해져 내려온다는 게 너무너무 좋았죠."
문학 작품 중에는 20세기 러시아 환상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프랑스 문학이론가 츠베탕 토도로프에 따르면 환상문학 작품은 현실에 기반을 두되, 주인공과 독자가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망설이게 한다.
'저주토끼'는 여기에 과학소설(SF)까지 아우르는 '사변소설(speculative fiction)'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정씨는 어릴 때 뉴스로 소련 붕괴 소식을 접하면서 러시아를 비롯한 옛소련 국가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러시아 글자를 읽고 싶어서 연세대 인문학부에 입학해 노어노문학을 전공했다며 "이때 발을 들였다가 깊이 빠져서 이 지경이 됐다"고 웃었다.
이후 미국 예일대에서 러시아·동유럽 지역학 석사를, 인디애나대에서 슬라브 문학 박사를 취득했다.
정씨는 해외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2008년부터 환상문학 웹진 '거울'에 SF 소설 등을 꾸준히 기고해왔다.

'발랄하고 통통 튀는 신인 작가, 98세에 사망하다'
그는 지난 3월 초 '저주토끼'가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후보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처음 전해 들었다. 3월 6일 러시아 침략 반대 시위에 이어 여성의 날 행진과 노동자 대회에 잇달아 참석하며 바쁜 시위 일정을 소화하던 때였다.
"('저주토끼' 영문판을 출간한) 영국 혼포드 출판사에서 갑자기 해상도 좋은 사진을 보내달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사진을 보내고나서 시위 때문에 너무 피곤해서 잠들었어요."
그는 "이후 1차 후보에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영국식 농담이라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정씨가 '농담'이라고 굳게 믿은 이유가 있다. 국내 문단에서 장르소설을 '급이 낮은 소설'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장르문학은 일반적으로 SF, 추리소설, 호러, 스릴러 등 장르적 특징이 뚜렷한 대중 장르 소설을 뜻한다. 순수문학에 반대되는 대중문학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정세랑 작가는 에세이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수 없어'(2021)에서 문단 내 은근한 차별을 언급하며 "장르 소설가들은 늘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썼다.
"김보영, 정세랑 등 장르소설 작가들을 만나면 하는 얘기가 있어요. 이러다간 우리는 늙어 죽어서도 묘비명에 '발랄하고 통통 튀는 신인 작가, 98세에 사망하다.' 이렇게 적힐 거라고요."
'발랄하고 통통 튀는, 상상력 넘치는 신선한 젊은 작가'는 2000년대 말 웹진에서 그를 비롯한 여러 필진을 소개하는 문구였다.
'무명의 작가'가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는 극적인 찬사에 작가의 오랜 팬들이 기뻐하지 않은 이유다.
순수문학이 아닌 변방의 장르라서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을 뿐, 그는 누구보다 오랫동안, 활발하게 활동해왔기 때문이다.
정씨는 웃으며 "무명이라고 하면 국립과천과학관에서 주관하는 SF어워드에 모욕이 될 것 같다"고 밝혔다.
작가는 2014년 '씨앗'으로 제1회 SF어워드 단편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결코 흔치 않은, 국가기관이 주관하고 10년 가까이 유지되고 있는 장르문학상이다. 그동안 수많은 상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앞서 2008년 제3회 디지털문학상 모바일 부문 우수상도 수상했다. 다만 국내 문단에서 인정하는 '유력 문학상'을 받은 이력이 없을 뿐이다.
그는 오랫동안 책을 내고 작가들과 교류해왔음에도 공식적으로 이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작가들이 많다고 했다. '정식 등단' 절차를 밟지 않았고, 과거 수상했던 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는 "장르문학상이 계속 유지돼야 좋은 실력을 갖춘 작가들이 그 이력을 가지고 계속 활동할 수 있고, 그래야만 검증된 작가들이 모여 국내 장르문학을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금 장르문학이 가진 힘이 굉장히 크고,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의 시대가 오면서 컨텐츠의 가치를 갖게 됐다"며 "'고요의 바다', '오징어 게임' 같은 작품이 계속 나오길 원한다면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했다.
정씨는 "(부커상 최종후보 선정은) 제가 뭘 잘해서가 아니라 편집장님의 기획력과 번역가님의 노력이 합쳐져서 이룬 결과"라면서도 '장르문학'이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로 오른 사실에 큰 기쁨과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부커상이란?
영국 부커상은 스웨덴 노벨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더불어 3대 문학상으로 손꼽힌다.
부커상은 1969년 영국 식품유통사인 부커-매코널이 제정한 문학상으로 영연방 작가 소설을 대상을 대상으로 한다. 2002년부터 2019년까지 금융투자회사 맨그룹이 후원사로 참여하는 동안 '맨부커상'으로 불렸다.
2005년에는 인터내셔널 부커상(당시 인터내셔널 맨부커상)을 신설해 영연방 출신 작가가 아니라도 작품이 영어로 번역돼 영국 또는 아일랜드에서 출간됐다면 번역가와 함께 시상했다. 2016년에는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한국 최초로 부커상을 수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