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생식능력 제거 수술 없어도 성별정정 가능'... 첫 허가

윤지현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 사무처장이 8일 서울 이태원에서 열린 '랜스야 생일 축하해' 트랜스젠더 가시화 캠페인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출처, 뉴스1

사진 설명, 윤지현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 사무처장이 8일 서울 이태원에서 열린 '랜스야 생일 축하해' 트랜스젠더 가시화 캠페인에서 발언하고 있다

자궁적출술과 같은 생식능력 제거 수술이나 외부 성기 성형수술을 하지 않아도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별을 정정할 수 있다는 법원의 첫 판단이 나왔다.

한번 수술을 하면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적인 제거가 성별을 인정받기 위해 꼭 필요한 요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처럼 생식능력까지 제거하지 않았더라도 다른 조건이 충족되면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별을 정정할 수 있다고 법원이 결정한 것은 처음이다.

트랜스젠더 방송인 하리수 씨가 지난 2013년에 열린 퀴어문화축제 거리 퍼레이드에 참여 하고 있다

사진 출처, 뉴스1

사진 설명, 트랜스젠더 방송인 하리수 씨가 지난 2013년에 열린 퀴어문화축제 거리 퍼레이드에 참여 하고 있다

'생식능력 제거는 성별정정 필수요건 아니다'

수원가정법원은 지난 13일 트랜스젠더 남성 박모 씨(21)가 낸 성별 정정 신청을 허가했다.

여성으로 태어난 박 씨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자신을 스스로 남성으로 인식하기 시작해 2019년 성전환증을 진단받았다. 이후 유방절제술을 받고, 남성 호르몬 요법을 거치면서 외모와 목소리가 남성화됐지만 자궁적출술이나 남성의 성기를 만드는 성형수술을 받지는 않았다.

박 씨는 지난 2019년 자신의 성 정체성에 맞춰 법적 성별을 남성으로 바꿔 달라며 가족관계등록부 정정 신청을 법원에 냈다. 하지만 1심은 "신청인이 성전환을 위한 의료적 조치 중 유방절제술 등을 받았지만 난소 적출술 등을 받지 않아 여성으로서의 신체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라며 박 씨의 신청을 기각했다.

하지만 항고심의 판단은 달랐다.

항고심은 "자궁적출술과 같은 생식능력의 비가역적인 제거를 요구하는 것은 성적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해 신체의 온전성을 손상토록 강제하는 것으로서 자기 결정권과 인격권, 신체를 훼손당하지 않을 권리를 지나치게 제약하는 결과가 된다"라고 성별 정정 허가 사유를 밝혔다.

이어 "신청인은 남성화된 현재 모습에 대한 만족도가 분명해 여성으로의 재전환을 희망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라며 "여성으로서의 생식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단정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성으로의 전환이 신분 관계의 안정성을 해친다고 보기 어렵다"라고 덧붙였다.

앞서 지난 13년 남성 성기를 갖추지 않아도 성별을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꿀 수 있다는 법원 판단이 나온 사례는 있었지만, 당시에도 자궁적출술을 필수요건이었다.

그동안 법원은 생식능력 제거술이나 외부성기 성형 수술 여부를 성별정정 '허가기준'으로 삼아왔다. 하지만 지난해 2월 법이 개정되면서 이러한 '허가기준'은 '참고사항'으로 변경되었다.

소송을 대리한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백소윤 변호사는 이번 법원의 결정에 대해 "트랜스젠더의 자기결정권, 인격권, 신체를 훼손당하지 아니할 권리를 인정하며, 현행 대법원의 지침은 참고사항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라고 말했다.

2018년 퀴어문화축제를 앞두고 서울 주한미국대사관에 성소수자(LGBTI)를 상징하는 무지개 현수막이 걸려 있다

사진 출처, 뉴스1

사진 설명, 2018년 퀴어문화축제를 앞두고 서울 주한미국대사관에 성소수자(LGBTI)를 상징하는 무지개 현수막이 걸려 있다

해외에서 보는 성별정정 요건은?

최근 세계 곳곳에서 성별정정 절차에 있어 성전환수술을 요구하거나 요건으로 규정하는 것을 기본권 침해라는 결정이 이어지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지난 2012년 제정한 '성별 정체성 법'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성별 정체성에 대한 인식, 자유로운 인격의 발달, 서류상 확인의 권리를 갖는다"라고 명시하며 성별 정체성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고 있다. 이에 따라 성별정정 절차에 별도의 요건이 없다. 신청인이 '만 18세 이상이라는 소명, 법률에 따라 보호받는 존재로서 성별의 변경을 원한다는 진술, 변경하고자 하는 이름,' 이렇게 3가지만 행정 당국에 제출하면 별도 심사 없이 새 신분증이 발급된다.

유럽 인권 재판소는 2017년에 성 전환자의 성별 변경에서 원치 않는 불임수술을 조건으로 하는 것은 유럽 인권협약에서 정한 사생활의 존중에 대한 권리, 신체의 완결성에 관한 권리를 위반하는 것이라고 판결했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지난 2011년 개인의 생식능력을 제거하고 외부 성적 특징을 바꾸는 수술을 받도록 하는 것은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권리와 신체적 온전성에 대한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헌법불합치 결정했다.

최근 9월, 대만의 타이페이 고등 행정법원에서도 성전환수술을 하지 않은 트랜스젠더 여성의 성별정정을 허가하는 판결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