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완다 학살 25주년: 살아남은 고아들의 이야기

25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피해자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사진 출처, Getty Images

사진 설명, 25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피해자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르완다 집단 학살 이후 25년이 지났다.

당시 9만5000명이 넘는 아이들이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됐다.

오스왈드도 그 중 한 명이다.

시체 더미에서 구조된 그는 부모의 생사도, 생일도, 이름도 모르고 25년을 보냈다.

조세핀은 그를 구한 여성이다.

그 역시 학살로 남편을 잃고 군인들에게 강간당해 HIV에 걸리는 등 어려운 삶을 살아왔다.

25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피해자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르완다 집단 학살

유니세프는 9만5000여명의 아이들이 당시 고아가 됐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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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유니세프는 9만5000여명의 아이들이 당시 고아가 됐다고 발표했다

1994년 발생한 르완다 집단 학살은 불과 100일이라는 시간 동안 80만 명이 넘는 이들이 학살당한 사건이다.

이 비극은 다수파 피지배계급 후투족이 소수파 지배계급 투치족과 민족 갈등을 겪으며 비롯됐다.

기득권 선점을 두고 민족 갈등을 겪던 두 민족이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994년 4월 6일 후투족 출신 르완다 대통령 쥐베날 하뱌리마나와 부룬디 대통령 시프리앵 은타랴미라가 비행기 요격 사고로 수도 키갈리 근처에서 사망하면서 두 민족이 본격적으로 대립했다.

이때 강경파 후투족은 투치족뿐만 아니라 자신에 동조하지 않는 온건파 후투족까지 80여만 명을 대량 학살했다.

이는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한 홀로코스트 이후 최악의 참사로 꼽힌다.

오스왈드

(왼쪽부터) 고아로 자란 장 피에르, 이브라힘, 오스왈드
사진 설명, (왼쪽부터) 고아로 자란 장 피에르, 이브라힘, 오스왈드

오스왈드는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의 한 시체 더미에서 조세핀에게 발견돼 구출됐다.

죽은 여성의 가슴에 안겨있던 그는 당시 태생 2~3개월이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조차 정확하지는 않다.

확실한 건 그가 25년 전 르완다를 비극에 빠지게 했던 100일간의 학살 사태 동안 이름, 생일, 역사를 빼앗긴 어린아이 중 한 명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오스왈드는 당시 너무 어렸기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가족들이 피해자들과 함께 묻혀 있을 수도, 극적으로 살아남아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었다.

"부모님께서 죽었다고 생각하는 게 50%, 여전히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50%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조세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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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투족 출신 조세핀은 오스왈드를 구하기 전 학살로 남편을 잃었다.

남편은 투치족을 도우려다 강경파 후투족에게 살해됐다.

이후 조세핀은 인터아함웨라는 민병대 군인들에게 강간당했다.

설상가상으로 HIV에 걸렸다.

그럼에도 조세핀은 오스왈드를 포함해 부모를 잃은 고아들에게 엄마가 돼줬다.

홀로 남겨진 아이들을 챙기고 키워냈다.

하지만 아이들은 자라면서 그들의 부모를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오스왈드는 그가 "아버지와 함께 있는 다른 아이들을 보면서 부모님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부모님을 찾아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비슷한 처지의 장 피에르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찾는 지경에 이르렀다.

"저와 닮은 사람을 보면, 제 친척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무모할 수 있는 방법이었지만 그에게 다행히 진척이 있었다.

장 피에르는 그와 닮은 여성에게 접근해 사연을 물었다. 그 역시 마침 당시 장 피에르의 나이쯤 되는 동생을 학살 당시 잃었다.

장 피에르는 여성의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떠났다.

어머니, 마만 아살리아

"마만 아살리아를 만나자마자 감동이 일었어요."

"바로 알았죠. 이 분이 내 어머니구나."

둘은 지금껏 매일 소통하며 지내고 있다.

DNA 검사를 해볼까도 했지만,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미루고만 있다.

고아들을 위한 상담 집단

불안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오스왈드와 장 피에르는 친구 이브라힘과 함께 고아들을 위한 상담 집단을 만들기로 했다.

그들에게 심리적 지원을 해줄 수 있는 집단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이다.

오스왈드, 장 피에르와 같이 고아로 자란 이브라힘은 부모를 찾기 위해 학살 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죽은 사람들의 사진을 가리키며 이 사람과 제가 닮았다, 저 사람과 닮았다...그런 이야기만 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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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죽은 사람들의 사진을 가리키며 이 사람과 제가 닮았다, 저 사람과 닮았다...그런 이야기만 들었죠."

당시 기대감에 가득 찼던 그에게 실망스러운 말들이 이어졌다.

"잃어버린 아들을 찾고 있는 생존자들을 만났지만 어떤 수확도 없었어요."

"죽은 사람들의 사진을 가리키며 이 사람과 제가 닮았다, 저 사람과 닮았다...그런 이야기만 들었죠."

고등교육도 받지 못하고 직업도 없는 그는 곧 큰 절망감과 고립감에 휩싸였다.

장 피에르는 그들이 희망을 잃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할 원동력이 없어요."

"지원도 없고요."

다만 이들은 서로에게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주고 있다.

또 이들은 '미래의 가족을 위한 희망(Hope of Future Family)'이라는 공동체를 설립해 비슷한 처지의 이들을 돕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