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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 왕세자비: 25년 후 사진을 통해 그녀의 삶을 기억하다
전 영국 왕세자비 다이애나는 한때 "세계에서 가장 사진이 많이 찍힌 여성"으로 알려져 있었다.
세상을 떠난 지 25주년이 되는 날,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보여지는 가장 상징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그녀의 삶을 돌아보았다.
다이애나 프랜시스 스펜서는 1961년 7월 1일 영국 노퍽 주 샌들링엄 인근 파크하우스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당시 알소프 자작과 자작 부인의 막내딸이었다.
1969년 부모가 이혼한 뒤, 그녀는 노샘프턴셔와 스코틀랜드의 집을 오가야 했다.
다이애나는 노퍽 주 디스 입시학원인 리들스워스홀에서 교육을 받았다.
1974년에는 켄트 주 세븐오크스 인근 웨스트히스의 기숙학교에 입학했다.
방과 후 그녀는 런던에서 일했고 처음에는 유모로, 때로는 요리사로, 그 후 런던 나이츠브릿지에 있는 영 잉글랜드 유치원에서 보조교사로 일했다.
왕세자와의 핑크빛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그녀는 매일 언론에 시달려야 했다.
그녀가 직장을 그만 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1981년 2월 24일,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스펜서는 버킹엄 궁전에서 공식적으로 약혼을 발표했다.
당시 약 3만 파운드(현재 환율 3만6000 달러)의 14개의 다이아몬드로 둘러싸인 사파이어 반지가 다이애나의 손가락에 끼워졌다.
이 반지는 매우 유명해졌고 현재 케임브리지 공작부인 캐서린이 착용하고 있다.
세기의 결혼식으로 불린 그들의 결혼식은 1981년 7월 29일 세인트폴 대성당에서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됐다.
데이비드와 엘리자베스 에마뉘엘이 디자인한 그녀의 드레스는 25피트(10m)짜리로, 상아 태페타와 앤티크 레이스로 만들어졌다.
버킹엄궁에서 대성당까지 가는 길에 약 60만명의 군중이 이들의 결혼을 환영했다. 부부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 화동들과 함께 궁전 발코니(위 사진)에서 군중에게 손을 흔들었다.
다이애나는 늘 대가족을 동경했다. 결혼 1년 뒤인 1982년 6월 21일 그는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윌리엄 왕자를 출산했다.
그녀는 왕실 상황이 허락하는 한 아이들을 평범하게 키우고 싶어했다. 그리고 윌리엄 왕자는 어린이집에 간 최초의 후계자가 됐다.
1984년 9월 15일, 윌리엄은 남동생을 얻었다.
그는 해리 왕자로 알려져 있지만 헨리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두 왕자는 개인 교육 대신 다른 평범한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 갔다.
다이애나는 두 아들을 애지중지하는 어머니였다.
해리 왕자는 다이애나에 대해 "우리를 사랑으로 질식시켰다. 그것은 확실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이애나는 그녀의 첫 미국 공식 방문 당시 백악관에서 배우 존 트라볼타와 함께 춤을 췄다.
다이애나의 인기는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패션 아이콘이 되었고, 그녀가 입은 의상은 전 세계 이목을 끌었다.
그녀는 에이즈 환자들의 곤경을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녀의 솔직한 연설은 편견에 도전했고 특히 에이즈 환자들과의 악수 등 간단한 접촉은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대중에게 증명하기도 했다.
다이애나 부부는 결혼생활 중 많은 해외여행을 함께 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이들의 별거 생활이 공개됐다.
1992년 인도 공식 방문 당시 다이애나는 타지마할 앞에 혼자 앉아 사진을 찍었다. 타지마할은 '사랑의 위대한 기념비'로 널리 알려져 있다.
공식적으로는 함께 하지만 실제로는 함께 하지 않는다는 공개 선언처럼 보였다.
다이애나는 평생 테레사 수녀와 친밀한 우정을 유지했는데, 테레사는 후에 성인으로 명명됐다.
자선사업으로도 유명한 테레사 수녀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 데 그녀의 삶을 바쳤고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두 사람은 6일 간격으로 사망했다.
다이애나와 찰스의 이혼은 1996년 8월 28일 마무리됐다.
이듬해 6월, 그녀는 전 세계 잡지 표지에 실렸던 79벌의 드레스를 경매에 부쳤다.
자선 사업을 위해 450만 달러를 모금한 것으로, 한편으로는 과거와의 단절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이애나는 1997년 1월 대인지뢰 사용 금지를 요구하면서 세계적인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지뢰반대 운동 단체의 루 맥그래스는 다이애나와 긴밀히 협력했다.
그는 나중에 다이애나의 지지가 대인지뢰 사용을 금지하려는 전 세계적 노력에 "전환점"을 제공했다고 밝혔다.
1997년 8월 31일 다이애나는 백만장자 사업가 모하메드 알 파예드의 아들인 도디 알 파예드와 함께 리츠 파리에서 식사를 했고 리무진을 타고 식당을 떠났다.
수많은 파파라치들이 그들을 뒤따랐고 이는 결국 자동차 충돌이라는 치명적인 비극으로 이어졌다.
그녀의 장례식 당시 100만 명 이상의 군중이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노샘프턴셔의 스펜서 가족의 집으로 가는 길에서 다이애나의 마지막 여정에 함께 했다.
그녀의 관 뒤로 전남편 찰스 왕세자와 당시 12살이던 막내 아들 해리 왕자, 그녀의 오빠인 얼 스펜서, 장남 윌리엄 왕자 그리고 에든버러 공작이 있었다.
그녀가 죽은 지 25년이 지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전 세계에서 "모두의 왕세자비'로 사랑스럽게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