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타나모 20년: 수용소 이후의 삶...'우리는 여전히 감옥에 살고 있다'

    • 기자, 조엘 건터
    • 기자, BBC News

쿠바 관타나모 만에 위치한 미 해군기지 안에 세운 '관타나모 수용소'. 예멘 출신으로 이곳에 수감됐던 만수르 아데피는 구금 14년만인 2016년 당시 세르비아 정부 대표단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 세르비아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고 했다.

아데피가 아는 것이라곤 1990년대 벌어진 발칸 전쟁에서 세르비아군이 보스니아 이슬람교도를 학살했다는 사실 정도였다.

아데피는 그 해 관타나모에서 석방될 예정이던 모든 수감자가 이를 알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세르비아로 가고 싶어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그는 19세 때 아프가니스탄에서 체포된 이후 32살에 기소되지 않고 풀려날 때까지 모든 시간을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보냈다.

앞서 미국 당국은 아데피가 테러 집단인 알카에다와 관련 있는지 여부가 불분명하다고 공식 인정했다. 이에 따라 구금자의 해외 '재정착'을 위한 복잡한 비밀 합의에 따라 아데피에게 석방 허가가 내려졌다.

아데피는 가족이 살던 카타르나 관타나모 수감자들 사이에서 대우가 괜찮기로 소문난 오만으로 가길 원했다.

그러나 관타나모 수용소 내 '캠프 식스'에서 세르비아 대표단과 회의를 하면서 아데피는 대표단이 그를 세르비아로 데려가고자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들의 설명을 들은 아데피는 정중히 거절했다.

"그들에게 매우 고맙다고 말했지만, 나는 이미 과거 (세르비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아데피에 따르면 대표단장은 세르비아는 이슬람교도를 환영한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세르비아 정부가 아데피가 교육 과정을 끝낼 수 있도록 도울 예정이며, 여권과 신분증도 발급해주는 등 그를 일반 시민처럼 대우하며 새롭게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석방에 관한 회의가 끝난 후 아데피는 미국 관료들에게 세르비아로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으나, 이들은 아데피의 의사는 사실 별로 영향력이 없다며 솔직히 말해줬다.

"대표단 회의가 끝난 뒤 미 국무부 특사가 나를 찾아와 '아데피, 당신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세르비아로 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39살이 된 아데피는 카리스마가 넘쳤고 웃음이 많았으며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었다. 아데피는 제대로 어른이 되기도 전에 수용소에 갇혀서 그렇다고 말했다.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까지 오게 된 아데피의 인생 여정은 아라비아반도 남서부에 있는 중동 국가 예멘에서 시작된다.

예멘에서도 수도시설이나 전기가 없는 어느 시골 마을에서 자란 아데피는 10대가 되자 학교 교육을 마무리하고 컴퓨터 과학을 공부하기 위해 수도 사나로 이사했다.

그러다 2001년 IT 연구 보조원으로 일하고 있던 아데피는 당시 사나에 있는 어느 교육 기관의 업무차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했다.

아데피가 도착한 지 4개월 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알카에다 조직원을 색출해내기 시작했다. 조직원을 신고하면 거액의 현금 보상을 약속한다는 전단이 하늘에서 뿌려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멘으로의 귀국을 앞두고 있던 아데피는 아프간 북부지역을 자동차로 지나던 도중 무장세력의 매복 공격을 받아 포로로 잡혀 미국에 인도됐다고 한다.

그 뒤 아데피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칸다하르에 있는 어느 미군 시설로 끌려갔다. 이곳에서 이집트 출신의 알카에다 지휘관이라는 의혹을 받아 옷이 벗겨진 채 구타당하고 심문당했다고 한다.

이후 아데피는 눈이 가려지고 족쇄를 찬 상태로 관타나모 수용소로 이송됐다.

아데피는 악명높은 이 수용소에서 14년간 자신이 겪은 일을 기록한 회고록 '여기 우리를 잊지 마세요(Don't forget us here)'를 지난해 출간했다.

회고록에서 아데피는 자신이 수감된 동안 경험한 고문, 심리적 학대, 형제자매의 죽음을 시간 순서대로 자세히 기록했다. 또한 수용소에서 영어를 독학했으며 컴퓨터 과학과 경영학 이론도 공부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석방 직후를 기점으로 멈췄다.

석방된 지 얼마 안 된 2016년 7월의 어느 날 밤, 비밀경호국은 베오그라드에 도착한 아데피를 도심의 한 작은 아파트로 데려갔다. 아파트 내부엔 감시카메라도 설치돼 있었다.

아데피는 아파트에 온 첫날 밤 자신에게 무슨 일이 펼쳐질지 궁금해하며 한숨도 자지 못했다.

지난 2월 어느 늦은 밤 베오그라드에서 아데피는 "당시 기진맥진했지만 잠들 수 없었다. 배고팠지만 먹지도 못했다"고 회상했다. "관타나모에서도 외로움을 느꼈지만 이것은 새로운 종류의 외로움이었다"는 것이다.

아데피는 베오그라드에서 시작된 삶을 "관타나모 2.0"이라 부른다.

세르비아에서 아데피는 고립된 채 제한된 삶을 살고 있다. 떠날 수도 없으며, 친구를 사귀려 해도 그가 다가가는 모든 사람에게 경찰이 주의를 주며 쫓아낸다.

기소되지 않고 석방된, 다른 나라 출신의 전 관타나모 수감자 6명도 아데피와 비슷한 경험을 털어놓았다.

잊힌 채 살고 있으며, 신원 증명 서류 등이 부족해 제약이 있고, 경찰의 간섭과 살고 있는 국가나 심지어 특정 도시를 떠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렇기에 직장을 구하거나, 가족들을 만나거나, 타인과 관계 맺기도 힘들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아데피는 "우리의 삶에 온 걸 환영한다"면서 "이것이 바로 관타나모 이후의 삶"이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재정착' 합의로 전 관타나모 수감자들은 세르비아, 슬로바키아, 사우디아라비아, 알바니아, 카자흐스탄, 카타르 등 전 세계로 흩어졌다.

영국 등 고국으로 송환된 이들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나머진 낯선 외국으로 보내졌다.

미국 의회는 자신들이 보기에 불안정한 나라로 이들을 돌려보내는 건 안보상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아데피는 자신의 가족이 살고 있는 예멘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또한 예멘과 세르비아 측이 여권 발급을 거부하면서 아데피는 사실상 무국적자 신세로 베오그라드에 버려졌다.

관타나모 수용소를 둘러싼 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아데피의 '재정착' 합의는 비밀투성이다.

아데피의 변호사이자 전 관타나모 수용소 9명에게 무료로 법률 조언을 해주고 있는 베스 제이콥 뉴욕 변호사는 "공식적으론 아는 게 없다. 미국 정부가 변호인에게 어떠한 것도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객들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는 공개할 수 없습니다. 기밀로 분류된 경우가 대부분이고, 손에 들어온 자료도 내용을 알 수 없게 많이 편집됐습니다. 5장짜리 서류 대부분이 검게 가려져 있고 몇 글자만 간신히 둥둥 떠다니는 꼴입니다."

한편 미 국무부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수감자를 이송한 제3국으로부터 이들을 인도적으로 대우한다는 약속뿐만 아니라 "재정착한 수감자가 일으킬 수 있는 위협을 완화하기 위한 안전 조치" 및 "수감자가 성공적으로 사회에 재통합될 수 있도록 촉진하는 사회적 장치" 마련에 대한 확약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국무부 대변인은 가끔 관련 비용을 지원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 금액과 지원 기관에 대해선 분명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세르비아 정부 또한 BBC의 관련 질문에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아데피에게 '재정착' 합의는 보이지 않는 그물처럼 느껴진다.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권이 없기에 세르비아를 떠날 수 없고, 사전 허가 없이는 베오그라드를 떠날 수도 없다.

그는 경찰이 자신을 미행하고 있으며, 정부가 준 전화기에선 도청 장치도 발견했다고 했다.

또한 운전 허가를 받지 못해 금요 기도 모임에도 쉽게 참석하지 못한다. 가장 가까운 모스크(이슬람교의 예배 및 집회 장소)조차 버스로 상당한 거리이기 때문이다.

거주 허가증도 있고 집세와 추가 교육을 위한 경제적 지원도 받지만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보낸 지난 15년을 설명할 수 없기에 일을 구하기도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겨우 생계를 이어 나가는 수준이다.

게다가 아데피가 사는 지역은 이슬람교도가 거의 살지 않으며 할랄 푸드를 구하기 힘든 도시 교외 지역이라 주로 혼자 집에서 밥을 먹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버스를 타고 근처 쇼핑몰로 이동해 돌아다니면서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종종 가족 단위 젊은 쇼핑객을 오랫동안 바라본다는 아데피는 "(바라보는걸) 멈출 수 없다"면서 "내가 속이 텅 빈 껍데기 같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2016년 베오그라드에 도착한 직후 아데피는 미국 언론과 진행한 첫 인터뷰에서 자신의 새 삶이 불행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세르비아의 유명 타블로이드지는 아데피를 "알카에다의 지하드(무장 조직원)이자 유죄 판결받은 테러리스트"로 묘사한 기사를 전면에 내보냈다.

한편 친구를 사귀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가 다가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찰이 경고하기 때문이다.

아데피는 사람들이 이러한 내용을 말해줬다며 메신저 앱인 '왓츠앱' 대화 화면 캡쳐본을 갖고 있었다.

경찰은 그가 베오그라드에 도착한 지 몇 주 후 처음으로 간 카페에서 가까운 자리에 앉아있던 리비아인들을 심문했으며, 작년 모스크에서 만나 함께 커피를 마신 어느 젊은 이슬람교도에게도 그랬다고 한다.

아데피는 "경찰이 그를 세우더니 '알카에다의 아데피를 아는가'하고 물었다"고 회상했다.

"결국 저는 그 청년에게 제 번호를 지우라고 말했습니다. 누군가가 다치는 걸 원치 않았거든요."

아데피는 지난 2018년 미국 PBS 방송의 탐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프론티어' 와의 인터뷰 이후 경찰에 연행돼 구타당했으며, 같이 언어 수업을 듣던 친구 2명도 체포됐다고 했다.

이뿐만이 아니라 같은 전화 수리 수업을 듣던 여성 또한 도서관에서 아데피와 몇 마디 나눈 후 경찰에 의해 저지당했다. 아데피는 이 여성이 보낸 메시지를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복경찰이 자신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이유를 묻는 메시지였다.

그래서 아데피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혼자 대부분 시간을 보낸다. 지난해 야외에서 기도하는 모습이 포착돼 경찰에게 귀가조치 당한 이후론 이웃과도 거의 교제하지 않으며 쇼핑몰에도 자주 가지 않는다고 했다.

아데피는 "이런 생활이 이어지면 잠시 뒤 포기하게 된다"면서 "이는 고립된다는 뜻이다. 나는 대부분 내 머릿속에서 혼자 지낸다"고 말했다.

아데피는 그나마 전 관타나모 수용자 출신들이 모인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친구 비슷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네트워크 형성을 돕기도 했던 아데피는 이들을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주로 '왓츠앱' 단체 메시지방이나 전화로 소식을 주고받는다고 했다.

혹시 누군가 재정착한 나라에서 위험에 빠지진 않을까 싶어 이들의 대화 내용은 대체로 정치와 무관했다. 아데피는 "우리는 노래를 부르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서로 사진을 보여주고 건강과 안부를 묻는다"면서 "관타나모의 죄수복, 음식과 같은 추억을 나눈다"고 말했다.

이러한 교류가 "우리를 계속 살아나가게 해준다"는 것이다.

한편 아데피가 교류하는 전 수감자 중에는 관타나모에서 거의 13년을 보낸 예멘 출신 사브리 알-쿠라시도 있다. 현재 알-쿠라시는 핵실험장이 있는 카자흐스탄 극동부의 작은 도시 세메이로 이송됐다고 한다.

알-쿠라시는 다른 동료 수감자 4명과 함께 지난 2014년 카자흐스탄에 왔다. 이들 중에는 재정착 4개월 만에 신부전으로 사망한 아심 타히트 압둘라 알칼리치와 심장 질환을 앓고 있었으나 세메이에서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지난해 아프리카 모리타니로 보내졌지만 결국 심장병으로 사망한 롯피 빈 알리도 있다.

빈 알리가 세상을 떠나면서 세메이에 홀로 남은 알-쿠라시는 "감옥보다 더 못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알-쿠라시는 카자흐스탄 대통령과 총리, 미국 대사관,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에 자신을 석방하거나 차라리 관타나모 수용소로 돌려보내 달라는 서한을 보냈으나, 돌아오는 답변은 없었다.

카자흐스탄 정부 또한 BBC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알-쿠라시는 "관타나모 수용소가 이곳보다 더 좋았다"면서 "최소한 관타나모에선 언젠가 더 나은 곳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고 말했다.

"카자흐스탄 정부 대표단은 관타나모에서 저를 카자흐스탄 시민처럼 대우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거짓말이었어요. 저는 법적 신분이나 신분증도 없으며, 가족도 친구도 없습니다. 그냥 이곳에 갇혀있으며 끝이 보이지 않는 삶입니다."

알-쿠라시가 아파트에서 나올 때마다 경찰이 신분증을 제시하라고 할 때가 있다. 신분증이 없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가끔은 경찰서로 연행돼 국제적십자위원회 사람이 꺼내줄 때까지 7~8시간을 기다린 적도 있다고 한다.

어느 날 재킷을 벗으라는 요청을 거절해 사복 경찰이 휘두른 주먹에 맞은 알-쿠라시는 얼굴 신경이 손상돼 전문의 치료가 필요한 상태지만, 죽은 빈 알리와 마찬가지로 치료를 위한 수도행을 허가받지 못했다.

"저는 경찰서로 가서 절 때린 남성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입 닥쳐, 너는 여기서 아무것도 아니야. 집에나 가'라고 하더군요."

알-쿠라시는 해당 사건이 지역 당국의 자비에 기대 살아가는, 세메이에서의 자신의 존재를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당국은 그를 유죄 판결받은 테러리스트로 간주한다.

"날아드는 주먹이 첫 번째 고통"이라는 알-쿠라시는 "정의에 다가갈 수 없다는 현실이 두 번째 고통"이라면서 "나는 아무런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

지역 당국의 의심과 다르게 미국 정부는 알-쿠라시를 아프가니스탄의 훈련 캠프에 참석한 알카에다의 일원이라고 의심했으나, 기소한 적 없다.

과거 알-쿠라시는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알카에다의 은신처로 의심받는 장소에 있다 파키스탄 보안군에 의해 체포됐다. 그러나 그는 자신은 절대 알카에다 조직원이 아니라고 부인해왔다.

그렇게 관타나모 수용소에 오게 된 알-쿠라시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압수됐지만, 꽤 많은 수의 작품을 그렸다.

작화만이 "날 제정신으로 유지시켜주는 유일한 것"이라며 알-쿠라시는 세메이에서도 계속 그림을 그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온라인에서 그 어떤 것도 주문할 수 없기에 물감과 캔버스를 구하기 쉽지 않다. 또 한번은 전직 수감자들로부터 미술 전시회에 걸 작품을 출품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카자흐스탄 신분증이 없어 작품에 대한 본인 인증을 할 수 없어 결국 보내지 못했다.

알-쿠라시는 국제적십자위원회에 "내 그림을 태워야 하냐"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자신들의 임무는 알-쿠라시가 머물 곳이 있으며 먹을 게 있는지 확인하는 것뿐"이었다고 한다.

7년 전 가족들의 주선으로 어느 예멘인 여성과 결혼했지만, 세메이를 떠날 수 없었기에 한 번도 아내를 만나본 적 없다. 아내 또한 알-쿠라시와 함께 살기 위해 카자흐스탄으로 올 수 없다.

여러 카자흐스탄 관료들에게 출국을 허가해 달라고 간청했음에도 변하는 건 없었다.

"저는 제 삶이 시작되길 7년째 기다리는 중입니다."

한편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석방된 수감자 총 779명 중 범죄 혐의로 기소된 이들은 12명이며 이들 중 단 2명만이 실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지난 2006년 미국 새튼 홀 대학 법학대학원이 미 국방부의 자료를 분석한 결과, 그 해 감옥에 남은 수감자 517명 중 실제 미군에게 붙잡힌 비율은 단 5%에 불과했다.

86%는 파키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 '북부동맹'의 무장세력에게 붙들려 "미국이 의심스러운 적들을 체포하기 위해 거액의 현상금을 내건 시기에 미국에 넘겨졌다"고 한다.

한편 아데피는 이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말했다.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기에 잡혔다는 것이다.

"나는 일괄 거래 상품이었다"던 아데피는 "미국에 팔린 뒤 세르비아에 팔린 것"이라고 말했다.

수감된 지 7년째이던 지난 2007년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열린 행정 심사에서 아데피는 자신이 "지하드"이며 오사마 빈 라덴의 "아들"이고, "미국의 적이 되는 건 영광"이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아데피는 이는 항의와 반발의 표시였다면서 당시 수감자들은 변호사도 없었기에 심사 자체가 엉터리라고 주장했다.

아데피는 "수감자들은 심사가 뭔지 몰랐다. 그저 또 다른 심문이라고 생각했다"면서 "우리에겐 모든 게 심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당시에 '오늘은 저들을 이기리라. 내가 저들의 적이라고 말하리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즈음 아데피는 단식 투쟁 등 여러 시위를 조직하며 동료 수감자들 사이에서 비공식적인 지도자로 떠올랐다. 경비병들은 그에게 '웃는 얼굴의 말썽꾸러기'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또한 아데피는 수감 중에도 배우고자 애썼다. 영어를 독학하며 유창한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집필에도 관심을 기울여 관타나모에 대한 2권의 회고록도 썼다. 밀수된 종잇조각에 쓴 첫 번째 회고록은 압수돼 파괴됐다.

이후 법률 서한은 보호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바닥에 연결된 족쇄를 찬 채 수용소 내 교실에 몇 시간 동안 앉아 편지를 썼다. 이 편지들을 토대로 후에 회고록을 출간할 수 있었다.

아데피는 현재 관타나모 이후의 삶, 즉 세르비아에서 느끼는 어려움을 담은 새로운 책을 쓰고 있다. 베오그라드 내 그가 사는 아파트 한쪽 벽은 여러 사건을 적은 알록달록한 메모지로 가득 차 있었다.

메모에는 경찰의 심문, 친구를 사귀고 아내를 맞이하려 했던 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관심을 끌려 했던 노력 등이 기록돼 있었다.

그는 매일 '왓츠앱' 등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총 100명 이상의 다른 전직 수감자들과 소통한다. 이들 중 다수가 아데피와 비슷한, 제한된 삶을 살고 있다.

다프네 에비아타 미국 앰네스티 안보 및 인권 국장은 "미국은 이들에게 독특하게 끔찍한 상황을 조성했다"면서 "이들 중 다수가 고문당했으며, 인정도 보상도 받지 못했고 제대로 된 재활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여행할 수 없으며 생계를 꾸릴 수 없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또 다른 제한된 상황으로 옮겨버리는 것은 비양심적입니다."

아데피는 자신이 관타나모 수용소 이후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내를 맞아 가정을 꾸리는 것이라고 했다. 가끔 밤이면 이런 상상을 한다고 했다.

그러나 누군가를 만나려 노력해도 세르비아에선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아데피는 전통적인 방식대로 가족의 중매를 통해 같은 이슬람교도인 여성과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베오그라드 내 이슬람 공동체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이들이 테러리즘과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연관되고 싶지 않아 했기에 실패했다.

사실 아데피는 지난 2019년 어느 여성과 교제한 적 있다. 좋은 집안 출신이었던 이 여성과 1년간 연락을 주고받았던 아데피는 세르비아 당국에 이 여성을 만나기 위해 출국을 허락해달라고 빌었다. 그의 첫사랑이었다.

아데피는 이 여성에게 가게 해달라고 당국에 애원했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이 여성의 가족들은 더 기다리지 못했고 이 여성은 다른 남성과 결혼했다.

아데피는 "최악으로 고통스러웠던 시간은 처음에 끌려간 군사 시설도, 관타나모에서 보낸 15년도 아니었다"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라고 말했다.

"관타나모 수용소에선 고문을 당하지만, 영혼을 건드릴 순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영혼에 와닿는 고통이기에 고통이 더 큽니다."

관타나모 수용소에 첫 번째 수감자들이 들어온 지 2년이 지난 2004년 7월, 수용소 여건에 대한 첫 번째 공식 조사를 시작한 미 국방부는 "NEC" 또는 "비 적대적 전투원(non-enemy combatant)"이라며 38명을 석방했다.

이들이 알카에다나 탈레반과 관련이 없으며 미국에 적대적인 행동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상의 인정이었다.

한편 석방된 38명 중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붙잡힌 위구르인 5명도 포함돼 있었다. 미국은 이들을 중국 신장 지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소규모 무장단체인 '동튀르키스탄 독립운동'의 조직원이라고 의심했다.

위구르인을 박해하는 중국으로 이들을 돌려보내는 것은 안전하지 않았기에 미국은 알바니아와 합의를 맺었다. 결국 2006년 풀려난 이들 5명은 어느 늦은 밤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에 도착했다.

자유의 몸이 됐다는 기쁨은 도시 변두리에 있는 지저분한 난민촌에 도착했을 때 곧 사라졌다. 이곳에서 이들은 1년 이상 지냈다.

현재 티라나 외곽의 낡고 가난한 교외 지역에서 가족과 조용하게 살고 있는 52세의 위구르인 아부 바커 카심은 "(난민촌은) 다른 세상 같았다"고 회상했다.

"관타나모에서 5년간 더위와 싸우며 지냈는데 갑자기 알바니아의 차가운 추위와 싸워야 했습니다. 언제나 두꺼운 옷을 입고 난민촌의 낯선 사람들 틈에 끼어 맛없는 음식을 먹었습니다."

카심은 자신이 '동튀르키스탄 독립운동'의 일원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파키스탄을 통해 터키로 이동하던 중 무장세력에 의해 체포돼 미국에 인도된 것이라고 했다.

아데피와 마찬가지로 카심을 포함해 알바니아로 온 수감자들은 경제적 지원, 여권 및 시민권 발급, 아파트 제공 등을 약속받았지만, 막상 현실은 달랐다고 한다.

한편 2002~2006년까지 수감됐던 우즈베키스탄 출신 자키르 하삼은 "관타나모 수용소엔 당시 수용소 6곳 있었는데, 알바니아 난민촌이 7번째 수용소"라고 말했다.

"난민촌 방 한 칸에 4~5명이 모여 살았습니다. 주변엔 철조망이 쳐져 있었고, 수중엔 돈도 없었고 제대로 된 음식도 구할 수 없었습니다. 당국은 우리를 정치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안전하게 유지하는 것만이 그들 일의 전부라고 했습니다."

난민촌에서 1년을 보내고 여러 차례 시위를 벌인 뒤에야 이들은 티라나 내 아파트로 옮겨갈 수 있었다.

이들의 삶은 아데피와 알-쿠라시에 비하면 나은 삶을 살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운이 더 좋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다.

결혼하거나 재혼한 이들도 있으며, 카심과 하삼 모두 자녀를 뒀다. 매달 임대료와 고지서 금액을 지원받으며, 지역 사회에 성공적으로 낄 수도 있었다. 이슬람교도가 다수인 국가에 보내진 게 이들에겐 행운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 또한 세르비아, 슬로바키아, 카자흐스탄 등으로 보내진 수감자들과 마찬가지로 삶에 제약이 있었다.

여권이나 취업 허가증이 없기에 여행을 할 수도 없으며, 부족한 정부 지원을 보충하기 위해 합법적으로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다.

카심은 "이것은 자유가 아니"라면서 "감옥에서 풀려나 다행이지만,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했다.

카심의 아내는 "조금 상해서 가격이 가장 싼 채소와 과일을 산다"고 말했다.

"(지원금은) 보통 15일 안에 다 떨어지기에 제대로 장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저축하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우린 혼자이며, 외국인이고 도와줄 가족도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경제적 지원 덕에 이들은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위태로운 상황에 부닥치기도 한다. 수감자 본인에게만 지원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가족도 제외된다.

실제로 카심의 친구인 알라 압드 알-막수트 마즈루가 5개월 전 코로나19 감염으로 사망했을 때, 마즈루의 아내 하티체는 알바니아 정부로부터 지원금이 즉시 중단될 것이라는 편지를 받았다. 게다가 어린 세 자녀와 함께 살던 정부 임대 아파트에서 오는 9월까지 나가달라는 내용도 있었다.

마즈루는 카심처럼 지난 2005년 불기소로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풀려난 수감자다.

아내 하티체는 알바니아 내무부에 직접 찾아가 호소하려고 했으나 출입조차 허가받지 못했고, 그 어떠한 대답도 받지 못했다. 하티체는 변호사를 고용할 경제적 여유도 없었다.

생계를 위해 온종일 일할 곳을 찾으면서도 세 자녀를 돌봐야 하는 하티체는 아이들을 먹여 살릴 수 없는 건 아닐지 가장 걱정된다고 했다.

그다음으론 아버지가 관타나모 수용소 출신이라는 이유로 혹시나 미래에 아이들이 박해받진 않을지 걱정된다고 했다.

"아이들의 미래가 걱정된다"는 하티체는 "아이들에게 관타나모 수용소의 낙인이 찍히는 건 아닌지 두렵다"고 말했다.

알바니아 정부는 관련해 아무런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한편 하삼은 "가장 큰 문제는 신분증이 없다는 것"이라면서 "이 때문에 삶의 모든 영역에서 방해받는다. 선택권도 없다. 어디에서 살지 선택도 하지 못하며 가족을 만나러 해외에 갈 수도 없고 어디서 일할지도 결정할 수 없다. 일자리를 구하러 가면 모두가 신분증과 과거 업무 경력 증명서를 요구한다"고 설명했다.

하삼은 매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고물상 시장에 가서 고장 난 스마트폰, 노트북, 라디오, 드릴 등을 찾아 헤맨다. 수리 후 다시 판매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구할 수 있는 괜찮은 물건도, 이로 인한 수익도 거의 없다고 한다. 2월 어느 주말엔 2시간 동안 시장을 뒤졌지만, 고장 난 스피커 세트밖에 찾을 수 없었다.

하삼은 무엇보다도 기계 수리 기술을 바탕으로 좋은 직장을 얻고 싶어 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앓는 두 아이에게 제대로 된 치료를 받게 해주고 싶다고 했다.

지난 2020년 하삼은 자신의 이름이 '월드 체크' 리스트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엔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리스트였지만, 이는 전 세계 은행들이 고객의 범죄 전력을 확인하기 위해 사용하는 글로벌 데이터베이스로, 단순히 이름을 올린 것만으로도 여러 제약이 뒤따를 수 있다.

또한 이 리스트를 운영하는 금융 시장 데이터 및 인프라 제공업체 '레피니티브'는 이름이 등록된 사실을 따로 통지하지 않는다.

이후 많은 전 관타나모 수감자들이 같은 해 이 데이터베이스에 추가됐으며, 관련 범죄로 기소된 적 없는 많은 사람들이 "테러" 범주에 포함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이제 한 영국 법률 회사의 도움으로 약간의 보상금이 지급되고 있다. 하삼과 카심은 각각 3000달러(약 380만원)를 받았다.

아데피는 아직 보상금을 받지 못했지만, 액수에 이의를 제기했다고 한다. "변호사가 30%를 가져간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많은 금액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지난달 아데피는 미국 '웨스턴유니온' 송금 서비스 이용을 아무런 설명도 없이 거절당했다. 어머니의 의료비에 보탬이 되기 위해 해당 서비스를 통해 매달 가족에게 소액의 돈을 보내고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이 서비스를 통해 기부금을 받기도 하고 해외에서 일당도 받는다.

거절 이유를 묻는 아데피와 BBC의 질문에 '웨스턴유니온'사는 회사 방침을 들었다. 회사 대변인은 '웨스턴유니온'사는 "규제 및 규정 준수 책임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며 아데피에게 관련해 연락을 취했다고 말했다.

아데피는 그 원인을 관타나모 수용소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재판도 받지 못한 채 구금됐던 과거의 긴 그림자는 여전히 삶 속 너무 많은 부분에 드리워져 있기에 언제나 느낄 수 있다.

아데피는 슬픈 목소리로 "이 그림자는 내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닌다"면서 "미국이 나를 15년간 처벌했고, 이제 전 세계 나머지 국가가 남은 삶 동안 나를 처벌한다"고 말했다.

한편 관타나모에 처음 수감된 날로부터 20년이 조금 지난 2월의 어느 날 밤 아데피는 아파트에서 영상 강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국 버지니아주의 학생들에게 자신이 관타나모에서 그린 작품들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아데피는 자신이 선호하는 배경(포스트잇으로 가득 찬 벽)에서 영상을 찍기 위해 작은 책상을 옮기고, 오렌지색 실크 스카프를 꺼내 목에 둘렀다.

관타나모로 이송된 아데피가 안대를 벗고 처음 본 색이 바로 오렌지색이었다. 관타나모 수감자들이 강제로 입었던 죄수복의 오렌지색은 후에 수용소 내 인권 유린의 상징이 됐다.

그리고 영상 촬영을 대비해 온라인에서 저렴하게 구매한 링 조명을 밝혔다.

아데피는 인터뷰나 강연 제의를 거의 거절하지 않는다. 책을 홍보할 기회이기도 하고, 자신에겐 젊은 세대에게 관타나모에 대해 교육할 의무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게다가 잠시나마 사람들을 접할 기회이기도 하다.

아데피는 먼저 관타나모 수용소 수감자들이 창작한 미술품의 목록과 작품을 수용소 밖으로 가지고 나가기 위한 수감자들의 투쟁에 대해 소개한 뒤 학생들에게 질문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가 영상 너머 만난 여러 학교와 대학교의 학생들은 관타나모의 실상 등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아데피는 이들 대부분이 자신이 관타나모에 보내지기도 전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상기시킨다고 했다.

아마 이쯤 되면 관타나모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란 질문은 다 받아봤을 테지만, 여전히 아데피는 유쾌한 모습으로 하나하나에 대답했다.

"어느 시점에 포기하게 됐나"는 질문에 "아데피는 "포기란 없다. 포기하는 순간 지는 것"이라고 답했다.

"우리(수감자들)는 그림을 그렸지만 그들은 그림을 빼앗았습니다. 글을 썼지만 파괴당했습니다. 우리는 단식투쟁을 했지만 이들은 우리를 해산시켰습니다. 그래서 단식 투쟁을 또다시 시작했습니다."

"저는 회고록을 두 번이나 썼습니다. 처음에 쓴 회고록을 빼앗겼을 때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집필했습니다."

아데피는 미국 작가의 도움으로 베오그라드에서 원고를 완성했고, 지난해 말 회고록을 출간했다. 또한 사회 및 노동시장 재진입에서의 전 수감자들이 겪는 성공과 실패를 주제로 논문도 쓰며 경영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관타나모는 여전히 아데피의 세계를 제한하고 있었다. 아데피가 하는 일 중 구금 생활과 무관한 건 거의 없다.

온라인 강연이 끝나자 링 조명을 끄고 다시 가구를 원래대로 배치한 아데피는 늦은 밤이었음에도 계속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다시 대화는 가족에 관한 내용으로 흘러갔다. 어느 순간 아데피는 어린 자녀들을 보살피고 훈육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아데피는 상상에 빠져 상상 속 아들과 딸을 쫓아 방안을 뛰어다녔으며,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활짝 웃었다.

상상을 마친 아데피는 행동을 멈추더니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아데피에게 있어 이 환상을 실제로 이루는 것만이 관타나모로부터의 진정한 탈출구일 것이다. 그날이 오기 전까진 오랜 비사법적 구금에서 기인한 기이한 삶에 갇혀있을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하던 의심의 눈초리가 따라온다"는 아데피는 낙심한 목소리로 "사람들은 미국도 실수할 수 있다는 걸 믿지 못한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4월 아데피의 변호사는 정부로부터 "아데피와는 끝났"으며 "프로그램은 종료됐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받았다.

그럼 이제 제한이 풀려 아데피가 일할 수 있고 운전할 수 있으며 여행할 수 있는 것인지 묻는 변호사의 질문엔 다음 회의에서 논의될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비록 암묵적이기는 하지만 아데피가 세르비아로 보내진 지 거의 6년 만에 제한 조치의 존재를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다.

아데피와 변호사는 여전히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