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면 제 얘기 들어주실래요?' 성폭행 피해자의 호소

지난달 22일 경기도 성남시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故 이모 공군 중사 분향소에 서욱 국방부 장관이 보낸 조화가 놓여있다

사진 출처, 뉴스1

사진 설명, 지난달 22일 경기도 성남시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故 이모 공군 중사 분향소에 서욱 국방부 장관이 보낸 조화가 놓여있다
    • 기자, 나리 킴
    • 기자, BBC 코리아

해군에서 상관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신고한 부사관이 극단적 선택을 한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5월 공군 여중사가 성추행 피해를 호소하며 극단적 선택을 한지 3개월 만에 비슷한 사건이 또 발생한 것이다.

해군은 12일 경기 모 부대 간부 숙소에서 A 중사(32)가 숨진 채 발견됐다며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밝혔다.

군 당국에 따르면 A 중사는 같은 부대 B 상사로 부터 지난 5월 부대 밖 음식점에서 성추행을 당했다고 진술했다. A 중사의 거부 의사에도 B 상사는 '손금을 봐주겠다'라며 신체 접촉을 했고, A 중사는 피해 사실을 당일 부대 주임상사에게 알렸다. 하지만 A 중사의 피해 사실은 3개월 뒤에야 부대 지휘관에 보고됐고, 지난 9일에서야 A 중사는 다른 부대로 파견 조치된 것으로 알려졌다.

공군 중사 성추행 사건에 대한 수사가 끝나지도 않은 가운데 연이어 유사 사건이 일어나면서 군 내 성폭력 대응 매뉴얼이 여전히 작동되지 않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피해 사실이 즉각 부대 지휘관에게 보고되지 않은 점과 가해자와 피해자 분리가 제때 이루어지지 않은 점,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A 중사에게 상담 등 심리 지원 대신 '휴가를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라는 권유를 하는 등의 제대로 된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부는 "조사본부와 해군 중앙 수사대는 이번 사건에 대해 철저히 수사하여 관련 법에 따라 엄중 처벌할 것"이라고 밝혔다.

故 이모 중사를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장모 중사가 오전 서울 국방부 보통군사법원에서 열린 첫 공판을 마치고 호송차에 탑승하고 있다

사진 출처, 뉴스1

사진 설명, 故 이모 중사를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장모 중사가 13일 서울 국방부 보통군사법원에서 열린 첫 공판을 마치고 호송차에 탑승하고 있다

한편 성추행 피해 공군 부사관 이모 중사 사망사건의 가해자 장 모 중사에 대한 첫 공판이 13일 국방부 보통군사 법원에서 열렸다.

장 중사는 지난 3월 부대원들과 저녁 자리 후 부대에 복귀하는 차 안에서 후임인 이 중사의 거듭된 거부 의사 표시에도 반복적으로 강제추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또 추행 당일 차량에서 내린 이 중사를 쫓아가 '미안하다', '없던 일로 해달라', '너 신고할 거지? 신고해 봐!'라는 취지의 말을 하고, '하루 종일 죽어야 한다는 생각만 든다'라는 취지로 자살을 암시하는 듯한 문자를 보내 특가법상 보복 협박 혐의도 받고 있다.

제20전투 비행단 소속 피해자 이 모 중사는 장 중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하고 이튿날 바로 보고했지만 동료와 상관 등으로부터 회유와 압박 등 2차 피해를 본 끝에 지난 5월 극단적 선택을 했다.

피해자가 죽음을 선택하는 이유

잘못은 가해자가 저질렀는데, 피해자는 왜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저버릴 수밖에 없었을까? 공군과 해군 두 사건 모두에서 드는 강한 의문이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유로는 여러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을 하지만 이번 두 사건의 경우는 환경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순천향대 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이연정 교수는 이번 사건에 대해 "아직까지는 한국은 남성 위주다. 성폭행 관련 일이 일어나면, 가해자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행실에 대해서 비난한다. 억울한 상황 때문에 우울증이 생길 수 있는데, 그것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답답하니까 죽음을 이용해서라도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이어 "피해자들은 특히 불안한 심리상태에서 자신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을 때 판단력이 흐려질 수 있다"면서, "더욱 주변의 보호와 관찰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이연정 교수는 또 성폭력이나 악플, 학교폭력 등 환경적, 상황적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생긴 우울증과 이로 인한 극단적인 선택을 줄이기 위해서는 사회적 인식과 제도 개선이 우선임을 강조했다.

이 교수는 "우선 시스템 변화가 제일 우선이겠지만, 사회적으로 정신과에 대한 편견도 함께 개선되어야 한다. 누군가 우울증과 정신적인 어려움을 호소할 때는, 이상하거나 사이코적인 것이 아닌, 누구나 힘든 상황에 노출될 수 있고,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인식개선과 국가적 의료보험 지원 등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피해자를 몰고 가는 것은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라고 설명했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피해자들

"저는 죽을 용기가 없어서 살아 있을 뿐이에요."

BBC 코리아가 만난 가정폭력 피해자 아라(가명) 씨도 이번 사건을 뉴스에 접하면서 '피해자들의 심정을 100% 이해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아라 씨는 자신이 이번 공군, 해군 피해자들과의 다른 점은,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한 점'이라고 했다.

아라 씨가 미국인 남편을 가정 내 성폭행, 가정폭력 혐의로 한국 경찰에 고소한 것은 지난해 10월이었다.

부부간 성관계 도중 갑자기 난폭해지며 폭행을 일삼는 남편 때문에 정신적, 육체적 피해를 시달리던 아라 씨가 결혼 1여 년 만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미 미군 범죄 수사대 CID (Criminal Investigation Command)가 벌인 조사에서 남편에 대해 '가정폭력과 성폭력 혐의 있음' 결과가 나온 상태였지만, 남편이 처벌을 받기 전에 미군을 제대하거나 미국으로 도망갈 수 있다는 우려에 한국 경찰에도 신고하기로 한 것이었다.

신고와 함께 남편에게는 '출국금지령'이 떨어졌지만, 그때부터였다. 아라 씨에게 가해진 2차 폭력이 시작된 것은.

주한미군은 아라씨(가명)를 가정 내 '성폭력 피해자'임을 인정했다

사진 출처, 주한미군 문서

사진 설명, 주한미군은 아라씨(가명)를 가정 내 '성폭력 피해자'임을 인정했다

'피해자'가 '가해자'로...2차 피해

"처음에 경찰에 신고하러 갔더니, '동영상 찍어 놓은 것 있느냐, 폭행이 있었을 당시 왜 바로 신고하지 않았느냐, 결국 본인도 거세게 항의하지 않았으니 폭력적인 성관계에 동의한 것 아니냐, 부부간 있었던 일은 확인할 수 없다. 한국법으로는 신고해 봤자 처벌하기 힘들다, 차라리 미군한테 맡겨라' 이래서 처음에는 포기했어요."

다시 마음을 먹고 변호사를 동행해 신고를 결심했을 때 아라 씨가 경찰에게 받은 첫 질문은 "혹시 본인도 폭력적인 성관계를 즐기신 거 아니에요?"였다.

"수치스러움을 넘어서 웃음만 나왔어요. 성관계 도중에 피가 나고 멍이 들도록 맞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상식적으로 경찰에 신고하겠어요?"

"신고해도 소용없었어요"

아라 씨가 피해자 조사를 위해 경찰서에 나선 건 신고 후 1달이 지난 뒤였다. 세 시간 넘게 진행된 조사에서 아라 씨는 오히려 자신이 가해자 취급을 받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BBC 코리아가 입수한 아라 씨의 피해자 조사 현장 기록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들을 수 있었다.

먼저 경찰은 피해자 신분보호가 필요한 아라 씨에게 '이미 남편하고 별거 중이니 신분보호가 필요하지 않으리라고 보인다. 어떻게 생각하시냐?'라며 신분보호 요청을 지양할 것을 권하는 발언으로 조사를 시작했다.

피해자가 남편이 성관계 도중 피해자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뺨을 때리고 목을 조르고, 피가 날 때까지의 폭행이 이루어졌음을 설명하자 경찰은 "성폭행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라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이유는 '성관계는 합의로 한 것이고, 때리는 행위는 둘만의 취향이라 경찰이 관여하기 어렵다'라는 이유에서였다.

"아무리 제가 폭행에 대해 합의한 적이 없다. 멈춰 달라고 사정을 했다고 말을 해도 '왜 더 거세게 저항을 하지 않았느냐, 어쨌든 계속 성관계를 하지 않았느냐, 그건 폭력적인 성관계에 합의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싫었으면 신고를 바로 하든지 아니면 이혼하면 되는 거 아니냐'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니까…"

결국 경찰은 남편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리고 수사를 종결했다. 담당 조사관에게 무혐의에 대한 이유를 들은 아라 씨는 그날 '죽고 싶다'라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한다.

"남편이 저와 나눈 문자 내용을 모두 제출했는데, 거기에 제가 '난 당신이 나를 강하게 하는 게 좋아'라고 썼다며 경찰이 그러더라고 '좋다면서요, 저희는 증언만 가지고 조사를 할 수 없어요. 증거를 바탕으로 해야 하고 증거는 문자밖에 없으니까, 결과에 불만 있으면 검찰에 고소하세요. 더 제가 해드릴 건 없습니다."

남편은 한국 경찰의 '무혐의' 결과지를 들고 미군 CID 조사단에게 재조사를 해 줄 것을 신청했다.

"제가 아직까지 살아있는 이유는, 아직 조사가 계속 진행 중에 있기 때문이에요. 만약 미군에서도 조사 결과가 남편에 대해 '무혐의'로 나온다면, 저도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요."

한국 경찰은 아라(가명)씨 남편의 가정 성폭력 혐의에 대해 '무혐의'를 결정했다

사진 출처, 한국경찰청 문서

사진 설명, 한국 경찰은 아라(가명)씨 남편의 가정 성폭력 혐의에 대해 '무혐의'를 결정했다

들리지 않는 '아우성'

얼마 전 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 (HRW)에서 발표한 '내 삶은 포르노가 아니다: 한국 디지털 성범죄' 보고서에는 BBC 코리아가 인터뷰한 아라 씨와 같은 38회의 성폭행 피해 생존자 이야기가 담겨있다. HRW가 진행한 설문조사에서도 설문 응답자는 "범죄 자체보다 경찰의 대응 방식 때문에 더 상처를 받는다"라고 답했다며, 한국 사법제도는 디지털 성범죄를 효과적으로 또는 인간적으로 다루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보고서는 92쪽에 달하는 보고서에서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으로 한국 정부뿐 아니라 법률 개선, 교육을 통한 시민의식 개선, 경찰과 검찰, 대법원 수사 방식 강화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지금도 한국에서 폭력을 겪더라도 그것이 폭력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거나, 폭력인지 알아도 2차 폭력이 두려워 신고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여성들이 있다. 심지어 용기 내 신고를 했다가 오히려 감당할 수 없는 2차 가해에 시달려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그리고 그때 사람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논하지만, 더딘 변화 속에서 희생자는 소리 없이 죽어가고 있다.